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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Oct 05. 2023

멀리서 보면 베짱이

20년 전에는 회계사들이 출근하고 당구만 치다가 퇴근할 때가 있었다고 한다. 10년 전에는 점심을 2시간 동안 먹고 오후에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며 놀 수 있었다고 한다. 수험 생활에 지쳐 있다가도 그런 얘기를 듣다 보면 고시반에만 갇혀 있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시즌'에 아무리 힘들게 일하더라도 '비시즌'이 있을 테니까 다 괜찮았다. 


기대와 다르게 내가 경험한 빅펌은 연중무휴였다. 내가 거래처 복이 없는 건지 일복이 많은 건지, 우리 팀은 이상하게 항상 바빴다. 기본적인 감사 업무 외에도 일거리가 계속 있었다. 


회사는 기본적으로 1년에 최소 한 번, 최대 4번 외부감사인(회계법인)에게 감사(검토) 받는다. 그래서 회계법인이 다른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1년에 최소 3개월, 최대 9개월은 노는 시간 (비시즌)이 생긴다. 하지만 법인은 놀면 그만큼 수익이 떨어지니 1년 내내 돈을 벌 수 있게 감사 이외에도 일감을 따온다. 


게다가 해가 지날 때마다 외감법이 개정되면서 일거리가 많아졌다. 회계법인은 시장이 호황이니 좋았겠지만, 비시즌만 보고 있던 월급쟁이는 좋을 게 없었다. 큰 계약을 따냈다며 축하하는 전체 공지 메일이 오면 '이 건 어느 팀에서 하려나, 고생하겠네'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런 중에 종종 바깥세상 이야기를 남의 나라 전설처럼 들을 수 있었다. 로컬 법인에 가면 겨울 비지 시즌에만 일하고 나머지 기간에는 세계 여행을 다닐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집에서 간간이 일하면서 연봉은 비슷하게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무도 뺏은 사람이 없는데 내 기회를 뺏긴 것 같았다. '나도 저렇게 지낼 수 있는데!'


기대 반 두려움 반을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로컬 시장으로 나와서야 나는 수험생 시절에 꿈꿨던 비시즌을 누릴 수 있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운동도 하고 배도 채우고 나면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된다. 어느 날은 집 근처에 있는지도 몰랐던 도서관에 가고 또 어느 날은 운전 연습 겸 혼자 드라이브를 간다. 평일에 예약 걱정 없이 여행을 가기도 하고 그냥 집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 하기도 한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이런 인생이 있었다니. 내가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일개미처럼 열심히 살았지만, 이제부턴 평생 베짱이만 하리라. 울면서 시험 공부하던 과거의 내가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다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게 시간이라 했다. 내가 놀고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만큼 나는 전문성을 키울 기회가 없었다. 전문직에게 제일 중요한 게 경험과 지식인데 나는 필드를 여러 개 하는 것도 아니고 여유 시간에 회계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니 중요한 걸 모두 놓치고 있었다.


퇴사할 때 빅펌 파트너님이 가서 놀다 보면 지루하고 바보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돌아오고 싶을 것이라 했다. 그때 나는 멍청해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생계와 직접 연관이 되다 보니 마냥 여유로운 베짱이처럼 지낼 수가 없었다. 


로컬에서 나는 프리랜서처럼 직접 거래처를 영업할 수도 있고 다른 회계사에게 하청을 받을 수도 있다. 욕심을 안 부리면 경쟁할 필요도 없는 줄 알았는데 빅펌에서 나온 순간 나는 자유경쟁 시장에 스스로 몸을 던진 셈이었다.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좋은 자료를 모으고,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진 않더라도 주변에서 일감이 있을 때 나를 떠올릴 수 있게 노력 중이다. 


별건 없고 예전 거래처 담당자님이나 동료들에게 안부를 묻고 매력 어필을 한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어떤 근황 얘기를 하면 재밌을까, 은근슬적 나를 기억해 달라는 멘트는 어떻게 하면 될까, DC 가능이란 말을 해도 될까. 나에게 잘해주셨던 담당자님들의 안부가 순수하게 궁금해서 연락했을 때도 괜히 불순한 의도가 섞인 것 같아 송구스럽다. 얼굴에 철판 한 두장으로는 부족하다. 이게 어른의 네트워킹인가. 




빅펌에서는 매해 최신 이슈를 경험해 본 경력자들이 로컬 시장으로 이직하고 지금은 나도 빅펌에서 갓 나온 편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일손이 부족한 주변 회계사님들이 내게 하청을 주고 있다. 하지만 내가 다시 일개미처럼 지내지 않는 이상 내년에도, 내 후년에도 그들과 겨뤄서 내 밥그릇을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입사한 이후에 제일 많이 했던 고민은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가였는데 지금 하는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이 일로 오래오래 먹고살 수 있는가이다. 이렇게 소심해서 계속 일할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도 있었지만 이 바닥에서 계속 버틸 궁리를 하는 걸 보면 일개미와 베짱이 사이에서 제 역할을 해내고 있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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