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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률 Oct 27. 2024

도피 휴직

오케이. 인정한다. 나는 내 힘으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 필라테스가 내 몸을 건강하게 해 주긴 했지만 마음까지 건강하게 해 주기에 50회 수업은 역부족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수능을 망쳤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자격증 시험에 떨어졌을 때부터였을까? 나는 이제 혼자 힘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럼 답은 뭐다? 도망이다. 퇴사든 휴직이든 모든 걸 내려놓고 잠시라도 멀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장기적인 휴식이 번아웃 극복에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고 하니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한 건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현실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당시 회계법인에서는 일감에 비해 회계사가 부족해, 퇴사나 휴직을 하려면 길고 긴 면담을 거쳐야 했다. 결국 회사는 "퇴사보다는 휴직이 낫지 않겠냐"며 2개월의 병가를 허락했다. 상대방 과실 100%인 접촉사고가 나를 구했다. 장기적인 휴식이라고 부르기에 2개월은 턱없이 짧았지만 병가 말고는 회사 어른들을 설득할 다른 논리가 없었다. 쉼이 필요해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 병가를 핑계 삼아 잠시라도 도망칠 수 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돈과 시간이 동시에 풍족했다. 답답했던 일상에서 빠져나오니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다. 병원도 다니고, 은행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면서 자유를 만끽했다. 특히 지상 천국이라고 불리는 하와이 해변에 누워 있으니 모든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복직이 2주밖에 남지 않자, 세상은 다시 우울해졌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불안감이 몰려왔다. 꼭 자격증 시험을 앞두고 긴장하던 그 느낌이었다. 심장이 발끝부터 내장까지 뛰는 것 같았고, 마치 커피를 다섯 잔은 마신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이 상태로 복직할 수는 없었다. 쉰 의미가 없을 정도로 일은 여전히 하기 싫었다. 예전에는 어느 정도 쉬고 나면 놀았다는 죄책감에 다시 공부든 뭐든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마저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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