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른논에 물대기_3

그랬으면 좋겠다

by 우렁군

고등학교 때, 밤 10시까지 강제로 남아야 했지만 왜 자율학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는지 모를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습관처럼 학교 후문에서 5분 정도를 위로 걸어가면 있는 공원을 자주 찾았다.


공원을 올라가면 항만의 풍경이 보였다. 항만에서는 24시간 작업이 이뤄지고 있어 밤에도 조명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덕분에 늦은 시간에 공원을 올라가도 밤바다를 환하게 볼 수 있었다.


벤치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봤다. 어느 날은 밀물처럼, 고민과 잡념이 조용히 차올랐다. 또 다른 날은 썰물처럼, 말없이 빠져나갔다. 물결도, 마음도, 늘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전반적으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 더 많았었다.

그중의 9할 정도는 의지와 능력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거기서 7할 정도는 돈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중고등학생이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찌할 수 없는 그런 날이 찾아올 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습관처럼 공원에 가서 벤치에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밤바다를 보며 생각했다. 어떤 일을 하든 좋으니, 10년 뒤, 15년 뒤엔 부자가 아니어도 혼자 먹고살기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은 벌어 보자.

그리고 조금이나마 내 의지대로 살아보자고 조용히 다짐했다.


15년 즈음이 지난 지금, 다행히도 엄청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진 않지만 월 예산을 꽉 졸라매면 그래도 밥 먹고 취미로 달리기할 정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돈은 벌게 되었다.

돈을 쫓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남들보다는 조금 더 악착같이 모은다. 앞뒤가 맞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균형이라고 자기위로를 해 본다.


자, 먹고사는 문제는 간신히 해결했으니 다음 10년은 어떤 걸 목표로 해야 할까?

정답은 가까운 데에 있었다. 퇴사 전 일 때문에 최근 자주 주말 출근을 했다.


주말에 출근을 하면 본부장 상무님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나와 있는 것이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것일까! 물론 아니었다.

"나는 취미생활도 없고 할 게 없어서 회사에 나오는 게 편해."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어." 등의 말씀을 하셨다.

높은 연봉, 높은 자리에 도달하면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고 배워 왔는데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으셨다. ‘회사’라는 이름이 지워지면 자기 자신도 함께 사라질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일주일 전에 퇴사를 했다.

퇴사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위의 원인도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10년 뒤에도 높은 확률로 회사를 다니고 있겠지만

과장 아무개 차장 아무개가 아닌 그냥 아무개 자체로도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을 쫓아 살고 싶다.


10년 뒤에도 마라톤 대회에서 개인 기록 갱신을 위해

치열하게 뛰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10년 뒤에도 보드게임을 하며 점수 1점에 치열하게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러고선 게임이 끝나면 언제 그렇게 치열했냐는 듯, 다 같이 맥주 한 잔하면서 하하호호 웃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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