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아 교정을 하고 6개월 정도 지났다. 얼마 전 교정치과에서 충치가 보인다고 전부터 충치 다른 치과에서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를 했었는데 여간 귀찮기도 했고 일정을 맞추는 것이 어려워서 자꾸만 미뤘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연차를 냈다.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쉬는 것도 좋지만 수요일이나 목요일 중간에 쉬는 것도 좋아한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는 기분이 약간 들기 때문이다.
늦잠을 잘 생각이었지만 평소처럼 일찍 눈이 떠졌다. 할 일 없이 전화기만 계속 붙들고 있다가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산을 오를까 하다가 좀 더 시원해지면 가야지 하고 옷을 갈아입고 대충 양치하고 세수만 하고 러닝을 하러 나갔다. 밖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약간은 시원했다. 유선 이어폰을 귀에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늘 뛰던 코스에서 러닝을 했다. 저녁보다는 훨씬 사람이 적어서 길과 공간이 확 트여서 좋았다. 뛰기 시작했을 때는 10km를 목표로 했는데 체력이 도저히 안 돼서 5km만 뛰고 한두 바퀴 정도 걸었다. 치과는 어릴 때부터 치료해주시던 원장님 치과에 전화해서 오전에 가겠다고 했다. 확인해보니 오늘은 오전 근무만 하는 날이었다. 하마터면 또 미루게 될 뻔했다.
집에 돌아와 씻고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나가려다가 눈썹 정리랑 면도까지 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책과 노트 그리고 핸드크림 정도 챙겨서 치과에 갔다. 자주 가던 치과는 어릴 때부터 나를 봐왔던 직원이 지금도 일한다. 아주 가끔 갈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만 갈 때마다 나를 몰라본다. 이건 그분이 나를 기억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늘도 마스크를 내려서 나를 알아보셨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는데 시간도 아끼고 많이 기다리지 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치료를 받고 수납하려는데 3만 원 정도만 나오면 좋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는데 무려 10만 원이나 치료비가 나왔다. 이번 달은 지금부터 돈을 좀 아껴야겠다는 생각을 좀 하게 되었다.
원장님과 직원분들께 인사를 하고 치과에 나왔다. 오랜만에 교보문고를 가야겠다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를 타면 15분 정도 거리라 금방 도착했다. 보통 책을 사러 갈 때는 어떤 책을 사려고 계획하고 갈 때가 있고 아니면 즉흥적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책이 보이면 사는 편인데 오늘은 후자였다. 나는 고전문학을 좋아해서 교보문고에 들어서자마자 고전문학 코너로 향했다. 책들을 보는 순간 눈에 보이는 책들을 모두 사고 싶었다. 그러기엔 내가 엄청난 부자도 아니고 사놓고 언제 다 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제할 수 있었다. 책들을 여러 권 둘러보다가 5권을 집어 들었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서머싯 몸의 <케이크와 맥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알베르 카뮈의 <안과 겉·결혼·여름>,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이렇게 5권을 구매했다. 언제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계산대에는 키오스크 시스템으로 바뀌어 있었는데 한참을 직원이 계산하고 있는 곳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확인을 해보니 상품권과 현금 계산을 하는 줄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고 키오스크에 다시 가서 계산했다. 평소 자주 쓰는 볼펜 두 자루도 같이 구매했다. 책 5권은 너무 무거웠다.
교보문고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책을 읽으려고 갔는데 앉으려고 했던 자리에 다른 커플이 먼저 앉는 바람에 놓쳐버렸다. 사방을 둘러보니 너무 시끄럽고 혼잡스러워서 다시 나와 교보문고 옆에 새로 생긴 다른 카페에 갔다. 넓고 깨끗하고 조용해서 거기서 책을 읽기로 했다. 구석진 자리를 좋아하는데 마침 자리가 나서 짐을 내려놓고 콜드브루 아메리카노와 스크램블에그 베이글을 주문했다. 커피와 베이글이 나오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앉은 자리에 벌레가 좀 있고 커피와 베이글 근처로 날라와서 불편하고 거슬렸다. 베이글은 따뜻하게 데워서 나오는데 나오자마자 반 정도 먹고 커피를 서너 모금 마시고 나서 챙겨 왔던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부터 읽었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은 책이기도 하고 몇 페이지 남지 않아서 금방 다 읽었다. 읽고 나서 다음에는 <인간의 마음>이라는 책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은 책을 다시 가방에 넣고 노트를 꺼내 생각과 마음에서 올라는 이런저런 것들을 쓰고 기록했다. 그러고 노트를 덮고 잠깐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으며 거울을 바라보는데 오늘따라 눈이 초롱초롱하면서도 차갑고 우울해 보였다. 자리에 돌아와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이런저런 기억과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카페 안에 혼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부터 신경이 지나치게 쓰일 정도로 거칠어지고 안 좋아진 여드름과 피부처럼 내 안에 있는 마음과 과거들이 심상에 떠오르고 회상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나 외적으로 성공한 것도 아니고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객관적으로도 잘 모르겠지만 회상에서 벗어나 나를 관조해보기 시작했다.
인간이라면 마찬가지겠지만 마음이 있고 과거가 있고 아픔이 있다. 나라는 인간도 그렇다. 때때로 아주 가끔은 우울감을 느끼고 살아간다. 특히 원치 않은 것들에 대해서와 주어지고 바꿀 수 없는 현실과 환경이 우울하게 만들고 크게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이면 그저 그런대로 스쳐만 지나갈 줄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수록 오히려 다른 형태로의 우울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에는 세상과 외부를 향하여 원망하고 탓했다면 지금은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되면서 느끼게 되는 우울감이다.
삶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받아들이며 사랑하며 살아가야지 하면서도 과거에 사무치거나 환경과 현실에 지배를 당할 때면 사랑하는 마음보다 현실과 조건에 굴복하고 마는 그런 우울감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가끔 왠지 모르게 찾아와 느끼는 우울감은 마음이란 것이 있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다. 그저 받아들이거나 이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여 돌파해 나갈 수밖에 없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책상에 읽으려고 올려둔 <호밀밭의 파수꾼>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이 텁텁해서 민트향 이클립스 한 알을 입에 넣고 커피를 두 모금 정도 마셨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펼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100페이지나 넘도록 책을 읽었다. 아까부터 거슬리던 벌레가 계속 방해해서 돌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일어나 카페에서 나왔다. 가방과 책 5권은 너무 무거웠다. 양손에 짐을 들고 걸어서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