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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라 Nov 20. 2019

내가 감기에 걸리는 온도 23도  

나를 지키는 겨울이 되기를 



 주말에 보일러 고장으로 감기에 걸려버렸다. 벌써 앓은 지 3일 차. 귀가 막힌 듯 멍하고 목이 부었다. 코 안에 수영장이 있는 기분이다. 추운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와서 올해는 절대 감기에 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심은 금물이었다. 


 내가 감기에 걸린 공간의 온도는 23도였다. 26도로 온도를 설정하고 잠에 들었는데 다음 날 눈을 떴을 때도 23도였다. 어쩐지 추워서 많이 뒤척였는데 그때 딱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다. 23도라는 온도는 별로 추울 것 같지 않은 숫자로 느껴지지만, 방은 냉기로 가득했다. 문을 열 때마다 찬바람이 피부를 강타하는 느낌이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보일러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인터넷 검색도 해보고, 관리사무소에도 연락하고, 보일러 회사에서 출장 서비스도 불렀지만 문제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게 보일러 이상으로 감기에 걸린 지 3일 차. 보일러 회사에서 한 시간 이상 뜯어보고 가스를 빼고 간 후로 1도가 올랐다가, 24시간이 지난 지금 1도가 또 올랐다. 방의 온도계는 25도를 가리킨다. 나는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부터 모든 방을 최고온도로 설정해놨다가 지역난방은 28도가 최고 온도라고 해서 28도로 모두 변경해둔 상태였다. 보일러가 한 걸음 한 걸음 힘겨운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여서 대견하게 느껴진다. 1도 1도 올라갈 때마다 찬기운이 빠져나가는 게 마치 내 모습 같다.




 어제보다는 감기가 조금 나아졌다. 물 먹는 하마처럼 뜨거운 작두콩차를 마시고, 가습기 아래에 딱 붙어서, 입을 벌리지 않게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잤더니 정말 놀랍게도 목이 나아졌다. 아직 귀와 코는 감기 증상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목이라도 괜찮아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추운 날씨엔 실내가 건조하지 않게 스스로 부지런히 관리해야 한다. 몸도 마음처럼 건조하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바스러지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니 수요일이 되었다. 이번 주는 아주 부지런하게 살기로 했는데 절반이 지나가버렸다. 마음먹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삶이라고 하지만 이번엔 조금 억울하다. 주말에만 오는 동거인은 23도에서 자도 멀쩡한데 왜 나는 바로 몸이 반응을 하는 걸까. 감기에 걸리면 종합감기 세트로 걸리는 것도 억울하다. 


  매년 겨울 혹시나 걸릴 감기를 두려워하며 시작한다. 한 번 걸리면 늘 고생을 심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정도로 감기에 걸리면 죽을병 걸린 것처럼 병원으로 뛰어가고 오두방정을 떠는 데에는 다 그만한 경험들이 쌓였기 때문이다. 2~3주 넘게 앓아누운 적도 있고, 편도가 붓고 입안이 헐다 못해 잇몸까지 벌어져 음식을 아예 못 먹을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감기 때문에 유체이탈 기분을 느낀 적도 있고, 누워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대화를 들은 적도 있다. 아프고 힘이 없었을 뿐 무섭진 않았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몸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예민하다. 그래서 웬만하면 처음부터 감기 같은 것에는 걸리지 않게, 또는 초기에 잡을 수 있게 갑갑해도 안에 얇은 옷을 겹쳐 입고, 목과 발을 따뜻하게 하고,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고르기 위해 한 번 더 고민을 한다. 나이를 적게 먹은 것도 아닌데 나는 아직도 내 예민한 몸에 적응을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오늘은 택배로 목에 감을 손수건과 미니 스카프 같은 것들이 왔다. 꽤나 촌스럽다. 따뜻한 것들은 촌스러운 모습일 때가 좋다. 그 촌스러움이 다정하고 사랑스럽다. 어리고 힘들 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촌스럽고 귀엽고 다정한 호호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모든 걸 훌쩍 뛰어넘어 어느새 할머니가 되어있었으면 싶었던 당시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촌스럽게 알록달록한 머그잔에 따뜻한 핫초코 한 잔을 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긴 시간 동안 겪은 행복, 아픔, 고난, 즐거움 등을 차곡차곡 쌓아서 그 정보를 바탕으로 어렵게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것이라 지겹기도 하고, 지긋지긋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묻는다면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라 답할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애정으로 오래 지켜봐 준 사람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아서 언제든지 나를 보살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의 삶은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외롭다 느끼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보고 공부하길 바란다. 내가 힘들어했던 순간들은 대체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일상에서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아플 때의 원인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준비해서 언젠가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바닥을 쳐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을 때 스스로 단단하고 용기있게 대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조금 쓸쓸할 순 있어도 적어도 내 몸이 괴롭지는 않게 나를 잘 돌보는 내가 되기를. 23도에서 감기가 걸린다는 걸 알았다면 24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게 늘 준비하기를. 


부디 모두 야무지고 씩씩한 겨울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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