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은 의학 정보 전달 목적의 글이 절대 아닙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생활화된 요즈음, 원래부터 재택근무를 하던 프리랜서의 삶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 같지만 사실 외출의 자유가 없는 재택근무는 일반 회사원들과 똑같이 괴롭다.
전에 없던 감금생활 덕분에 새로운 것에 도전해보고 싶어진 나는 고전 중의 고전(?)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이제야) 읽고 있는데, 왜 이 소설이 '주부'를 대상으로 그런 대히트를 쳤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코로나로 인해 독립의 꿈이 무너져 내리고 반강제로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이 생각은 더욱 강해졌다.
그전에, 최근 나의 대략적인 하루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일단 새벽까지 이런저런 글 마감, 개인 작품 준비를 하고 새벽~아침이 되어 해가 뜰 때 즈음 비척비척 잠이 든다. 깨어나면 오후 두어 시쯤, 그마저도 자의로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재택근무 중인 호적 메이트(a.k.a. 언니)에게 집 안에서 그나마 가장 사무실다운 내 방을 양보해줘야 하기 때문에 침대에서 내려온다. 내 짐을 한 아름 싸들고 거실로 나온다. 어그적 어그적 첫끼니로 늦은 점심을 먹고 뒤를 돌면 적당한 양의 집안일이 나를 기다린다. 밖은 안 나가도 빨래는 꾸준히 쌓이고 먹는 건 없어도 설거지는 계속 생기니까. 그동안에는 엄마가 가사를 담당하셨지만 엄마의 오랜 지병인 족저근막염이 심해지는 바람에, 집안에서도 잘 걷지를 못하시므로 가사는 대부분 내 차지. 근데 여기서 함정은 나도 족저근막염 있음.
빨래를 돌려놓고, 나까지 아프면 안 되니까 홈트레이닝으로 저스트 댄스와 링 피트로 한 시간 정도 몸을 움직여 최소 운동량을 채운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다. 언니가 원체 입이 짧은 데다 일 스트레스가 심해지니 입맛도 없다 해서 언니한테 맞춰서 저녁 메뉴를 선정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아이가 이유식을 안 먹어서 고민이라는 초보맘 심정이 진심으로 구구절절 이해 간다. 우리 애가 너무 밥을 안 먹어서 고민이라고 82cook에 글 올리고 싶다. 애가 몇 개월이에요? 어 음 그게 사백 몇 개월쯤...
여하튼 그렇게 여차저차 밥을 하고 설거지 하고, 뒷정리하고 그 사이에 빨래도 널고 시계를 보면 와 씨 뭔데 왜 이미 10시인데 시간과 공간의 집이야 뭐야? 그럼 한 짐 싸서 나온 보람도 없이 가지고 나온 보따리 그대로 8~9시쯤 퇴근한 언니가 앉아있던 내 방으로 귀환한다.
이때 방에 앉아 있노라면, 그러니까 정말 손도 까딱하기 싫은데 눈치도 없이 쌓여있는 일을 보면... 진심으로 회의감이 든다. 정말 오늘 아무것도 안 한 것 같고... 뭐 이런 생산성 없는 하루를 보냈나 싶고. 아니, 뭘 하긴 했지. 가장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움직였지. 그런데 바로 그 기본적인 활동에, 겨우 먹고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냔 말이다. 아무리 집안일이라는 게 해도 본전이고 안 하면 티가 난다지만, 집안일이 힘들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이 일이 내일도, 내일모레도 똑같이 계속 대기하고 있다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바로 이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치고 들어온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는 생활이 없다.
아무리 너저분한 플레이를 해도(사실 그렇게 너저분한 플레이를 하지도 않는다) 그 잔해를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된다!
새하얀 침대 시트는 늘 깔끔하고 매일 세탁되며(지구 환경에는 괜찮은 것인가) 화장실의 배수구에는 머리카락은커녕 음모 한 올 없고 주방 싱크대에 설거지 감이 쌓여있지 않은 삶이라니, 상상만 해도 꿈같다. (만약 당신이 이 모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지 않은데 이 모든 것이 갖춰진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끔 호사라도 부리고 싶어 큰 맘 먹고 사 온 15000원짜리 베쓰 밤도, 도저히 치울 엄두가 안 나 욕조가 있어도 샤워만 하고 마는 마당에, 그 욕조조차 내가 치우지 않아도 된다니 그건 뭐 천국 아닌가. 심지어 그걸! 어! 엄청나게 훌륭한 핫 섹스 굿 섹스를 하고도 누릴 수 있다니! 이 무슨 할렐루야니?!
소설 속 남자 주인공인 미스터 그레이는 오직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 아나스타샤(라고 쓰고 독자라고 읽는)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중간중간 도미넌트(지배하는)-서브미시브(복종하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지만 사실 크리티컬 한 내용도 없다. 이 정도면 라이트 하지 않아? 싶은. 하드코어 플레이도 없고, 동반되는 SM(가학-피학 성향) 플레이도 약간의 일탈일 뿐 엄청 안전하고 위험한 '기분'만 드는 판타지의 영역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게다가 미스터 그레이는 섹스 경험이 없는 아나스타샤가 보기에도 큰 것을 가지고 있다(!)
소설 속 신데렐라 스토리는 차치하고서라도, 그레이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에는 (자신의 만족도 물론 있지만) 애초에 “여자를 반드시 만족시킨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것은 작가가 그들의 섹스를 묘사하는 대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아나스타샤가 오르가슴을 느끼는 과정은 장장 6페이지에 걸쳐 서술되어 있지만 그레이가 삽입하고 사정하기까지는 채 반 페이지도 걸리지 않는다. 아아 이 얼마나 유쾌한 전복인가!
여성들이 그동안 경험한 대부분의 섹스는, 소위 말하는 '어깨 치기'따위가 아니었던가. 아까 말했던 바로 그 손도 까딱하기 싫은 순간에조차 툭툭 건드리면서- 한번 하자고 조르고, 상대 파트너의 만족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삽입하고 헉헉, 찍 싸고 "좋았어?"라고 묻는 밈과 같은 섹스! 이런 고초(?)를 겪는 여성들 입장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단비와 같은 콘텐츠였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연유로, 주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이유로 오히려 이 책을 깔보는 무리들이 있던데, 그래 인정한다. 이 책은 엄청나게 짜임새가 좋거나 잘 쓴 책은 아니다. 엄청 야하지도 않고 그다지 세련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힘이 실리는 것이다. 바로 그 적당히 유치뽕짝 하고 섹시하지만 천박하지 않은 그 부분이 좋은 거라고! 그리고 솔직히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이후에 전 세계를 통틀어 이만큼 대히트한 성인 소설이 있던가? 없잖아! 이걸 '엄마 포르노'라고 후려치는 것보다, 왜 이 책이 초특급 흥행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먼저 살피는 게 우선 아닐까? 애초에 현생이 만족스롭다면 성립할 구석이 없는 것이 바로 판타지니까.
내가 소설이나 사회학에 대해 좀 더 능통했더라면 이 내용을 좀 더 상세하게 썼겠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문가가 내놓은 책이 있네. 역시.
코로나 19로 인해 중국에서는 지난해에 비해 이혼율이 두배 증가했다고 하고, 뉴욕에서는 이혼상담 건이 50% 증가했다고 한다. 우리의 형제 국가라는 터키에서는 이혼 사건이 4배나 늘었다니, 결국 붙어있으니까, 현실과 현실이 부딫히니 더 싸우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나만 해도 가족에게 한주에 한 번씩은 꼭 아파트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내니까.(그래서 위아래 옆집께 매우 죄송하다)
결국 핫 섹스의 조건은 결국 현실과의 단절인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드는 새벽이다만- 내가 보기에는, 그전에 미스터 그레이와 같은 마인드와 사이즈를 탑재하는 게 우선인 듯. (둘 중에 하나 말고,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