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all the perfumes that I’ve loved.
내가 10년에 걸쳐 좋아한 향수 6병.
조향사도, 브랜드도, 이미지도 각각 다르지만 딱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스민을 미들노트로 사용한다는 것. 딱희 의도한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향수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1. Davidoff - Cool Water for women
내 인생 첫 향수였던 다비도프 쿨워터 포 우먼.
대학교에 입학기념 친언니의 선물.
나의 많은 처음을 함께 했던 향수라 향을 맡으면 일렁일렁하다 내 울렁거리고 곧 아찔한 기분이 든다. 모두가 잘 어울린다고 했던 향이었지만 특히 그가 좋아했다. 내 체향과 잘 맞았는지 오드 뚜왈렛인데도 다음날까지 향기가 안가시곤 했는데, 그럼 그는 나를 끌어안고 하루종일 안놔주기도 했다.
더이상 사용은 않지만 가끔 침대에 뿌리고 그 안에 가만히 누워 그때를 떠올리고는 한다.
이 향만 맡으면 정말이지 미쳐버리겠다고, 나를 터질듯이 꽉 끌어안았던 너를.
2, 3. L'Artisan Parfumeur - La Chasse aux Papillons & La Chasse aux Papillons extrême
라티잔 파퓨미에르 향수는 나에게 기억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파리의 마레 지구를 돌아다니던 중 우연히 발견한 돌담길 사이의 향수 가게. 창틀에 무심하게 올라와 있는 향수 병 너댓개를 보고, 가게 안에 고개만 들이밀고 뿌려도 되냐고 물으니 스타일 좋은 매니저가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하여 아무 생각없이 양손에 한개씩 살짝 뿌리고 다시 갈 길 가려는데 나도 모르게 백스탭해서 가게로 돌아가게 만든 마성의 향수.
긴 고민 끝에 라 샤스 오 파피용 엑스트렘과 떼 뿌르 엉 에떼를 샀지만 그 다음해 다시 파리를 찾았을때 라 샤스 오 파피용 마저 구입했다. 엑스트렘과의 차이는 각각 오드뚜왈렛과 오드퍼퓸의 차이.
엑스트렘이 오드퍼퓸인데 뚜왈렛과는 다르게 핑크페퍼 향이 나는 것이 특징. 옅은 후추향이 코를 긁어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만개한 하얀색과 핑크색 꽃밭같은 파피용 오드뚜왈렛보다 개성이 강하다. 참고로 파피용 엑스트렘은 영화 <미 비포 유>에 등장해 더욱 유명해졌다.
4. L'Artisan Parfumeur - Thé pour un Été
떼 뿌르 엉 에떼는 자스민 그린티향으로, 여름에 뿌리기 좋은 싱그러운 향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동양적인 향은 아니고, 프랑스인이(프랑스 향수니까) 처음 녹차를 마셨을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싶은 향.
깔끔하고 은은하고, 다만 풋풋하지 않다. 가벼운만큼 향이 날아가는 속도도 빠르지만 스위스 학창시절 내내 사용했던 향이라 말그대로 그때의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울면서 논문쓰고... 몇번째인지 모를 남자친구랑 헤어지네 마네 했던 뭐 그런... 더 이상 사용은 않지만, 추억을 위해 보틀 디자인이 바뀌기 전에 기념으로 한병을 더 구입했다.
5. Kenzo - Kenzo World
겐조 월드 오드 퍼퓸은 바로 그 미친 광고 때문에 사게 된 향수인데, 맞다.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연회장에서 몰래 빠져나와 발작을 일으키듯 춤을 추는 바로 그 영상.
광고가 나오고 얼마 안되었을때 약 세명의 친구들이 나를 태그하며 내가 생각났다고 하길래, 대체 어떤 향인가 했다. 그러다 그 해에 일본으로 여행가면서 면세점에서 한번 뿌려봤는데 웬걸, 나한테 너무 잘 어울리길래 그 자리에서 구입.
광고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달콤한 플로럴향 아래에 짙은 광기가 어려있다. 순진한척하는 후르츠 향기가 가시면 진한 자스민과 더불어 파우더리한 암브록산이 무겁고 섹시하게 덮쳐온다. 독특한 향.
6. Dior - J’adore eau de parfum
디올 자도르 오드 퍼퓸은... 그냥 나같은 향이다.
진한 자스민 향을 품은 금빛이 쏟아지는 향. 개인적으로 머리다 짧았을 때가 더 잘어울렸다고 생각한다. 화사하기보다는 우아한 향이라고 하는데 나는 성숙함쪽에 좀더 무게를 싣고 싶다. 역시 체향과 잘 어울리는지 이 향수를 쓰면 꽤 오래 남아 있곤 한다. 현재 메인으로 쓰는 향수인데 좀 심심해서 레이어드라도 해볼까 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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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향수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 현실에서, 더이상 향기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나를 질병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보호막이기에 결코 마스크를 탓할 수는 없지만, 불쾌한 냄새뿐만 아니라 향기까지도 원천차단 된다는 것은 너무도 슬픈 일이다. 정말이지 요즘 맡는 냄새라고는 내 잠옷 냄새, 내 방 냄새, 마스크 안의 내 숨냄새 정도밖에 없다. 정말이지 딴 냄새 좀 맡고 싶다.
향기를, 냄새를 맡을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가혹한 일일줄 누가 알았겠어. 코로나가 정말 많은 것을 바꾸는구나.
혹은 반대로 그렇기에, 그럴수록 이제는 향기가 더 중요한지도 모른다. 마스크를 벗는다는 것은 이제 신뢰의 상징. 친밀한 존재, 믿을 수 있는 존재 앞에서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만날 사람들은 다 만나겠지만 이제는 만나야 하는 사람들만 만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광활하고 영양가 없던 인간관계가 정리되고 소수의 친밀한 관계만을 유지하는 것이 요즘의 트렌드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의 향기는 그 사람들만 맡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 사람들만 나의 향을 기억해주면 되는 것이 아닐까.결국, 향기가 가지는 진짜 의미는 기억이다. 그날 너와 함께 걸었던 거리, 날씨, 온도, 입고 있던 옷, 읽던 책의 구절, 그런것들이 단 한번의 펌핑에, 자잘한 향수 방울 하나하나가 되어 떠오른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단번에 워프하게 만든다.
그래서 향수(香水)가 향수(鄕愁)인 이유는, 그리움 때문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