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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Feb 13. 2019

이토록 규칙적으로 게으른, 치앙마이의 하루

자극, 자극이 필요해?

아침 8시쯤 일어난다. 씻는다. 밖으로 나가 아침을 먹는다.

카페에 간다. 아이패드를 꺼내 이런저런 일을 한다. 점심을 먹는다.

숙소에 돌아와 낮잠을 잔다. 수영장에 간다. 저녁을 먹는다.

장을 보거나, 쇼핑을 한다. 숙소로 돌아와 씻는다. 밤 11시쯤 잔다.


이것이 간단하게 써본, 치앙마이에서의 나의 하루 일과이다.


그리고 이건 좀 더 상세히 써 본 나의 하루 일과.


아침 8시쯤, 알람 소리가 없어도 저절로 눈이 떠진다. 밖은 이미 밝다. 조금 더 자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는다. 같이 여행을 온 작가 친구는 아직도 꿈나라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굿모닝, 한국에 있는 소설가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바로 답장이 온다. 한국 시간은 10시, 2시간 시차가 그녀에게도 내게도 딱 맞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떤다. 참 뭐 그리 할 말이 많은지,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급한 업무를 처리한 후에야 겨우 메시지를 볼 틈이 있었던 한국에서의 생활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같다. 야, 우리 이제 씻자. 그래. 친구도 나도 샤워실에 들어간 후에야 대화가 일시 정지한다.


샤워를 하며 친구와 나눈 대화를 곱씹어 본다. 이거 글로 쓰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에 입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어 보지만, 정작 다 씻고 나와 타월로 물기를 닦에낼 때 즈음에는 마법처럼 증발해버린다. 왜 꼭 샤워하면서 생각난 아이디어는 샤워가 끝나면 사라져 버리는지. 컨디셔너를 씻어낼 때 같이 씻겨 내려간 건지, 아니면 2중 면도날 사이로 겨드랑이 털과 함께 사라진 것인지 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거울을 본다. 제법 길어진 머리가 어깨를 간질인다. 머리를 말리며 어딜 가서 아침을 먹을지를 고민한다. 집 앞에 있다는 로컬 국수 맛집이 있다던데, 거기를 가볼까. 그날그날 메뉴는 전적으로 구글 지도에게 맡긴다. 나는 어디를 들어가도 맛없는 것만 골라서 먹는, 마이너스의 손... 아니 입맛 중 마이너스의 입맛이기에 계획에 없는 식사란 내게 있을 수 없다. 머리를 다 말렸을 때 즈음, 작가 친구가 나를 부른다. 아이고, 삭신이 쑤셔요. 아이고 어째요.


가볍게 준비를 마친 후 아침을 먹기 위해 숙소를 나선다. 태국 북부식 국수, 죽, 가끔은 양식. 뭘 먹어도 든든하고 맛있는 이곳은 정말이지 천국이 아닐까.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카페를 찾아 나선다. 치앙마이에 온 지 일주일, 하루도 같은 카페를 간 적이 없다. 어제는 빵이 예쁜 곳, 오늘은 커피가 맛있는 곳, 내일은 분위기가 좋은 곳. 하루에 카페 2곳을 재패한 적도 있는데, 아직까지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장소는 찾지 못했다.


문자 그대로 밥보다 비싼 커피를 시켜 놓고 아이패드를 꺼낸다. 이곳 치앙마이에서 일반적인 식사 한 그릇은 30-70밧 사이인 것을 감안한다면, 70밧짜리 커피 한 잔이 얼마나 비싼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기호품으로써의 가치는 확실히 지니고 있는 셈이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이곳은 산미가 강한 커피를 선호하는 모양이라, 묵직한 맛을 선호하는 내 입맛에는 맞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연유를 넣은 달달한 태국식 라떼 커피를 좀 더 선호한다. 적어도 입 안을 확실히 채워주니까.


한국에서는 일주일 내내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풀리지 않았던 원고가 이곳에서 술술 풀리고 있다는 거짓말은 않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심해서 일을 하게 된다. 여기는 정말이지 할게 너무도 없다. 한국에는 넷플릭스도 있고, 빠른 인터넷도 있고, 여하튼 뭐든 정신머리를 팔 곳이 차고 넘치는데, 이곳에는 정말 그럴 수 있는 게 없다. 내 바로 앞에 있는 친구 역시 작가로, 손가락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글을 쏟아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나도 내 할 일을 한다. 다행히(?) 여행을 오기 전에 당분간 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양의 원고를 받아왔기에 할 일은 차고 넘친다. (그런데 왜 일이 있으면 딴짓을 하고 싶을까, 지금 이 글처럼 말이다.)


우다다 원고를 하고 난 후에는,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뜨거운 햇살을 피해 숙소로 돌아온다. 이곳은 11-3시 사이가 가장 햇살이 따가울 때라, 멋모르고 이 시간에 태닝이라도 했다가는 구릿빛 피부가 아니라 그야말로 통구이가 되기 십상이다. 이럴 때는 느긋하게 카페에 다시 들어가던지, 마사지를 받던지, 숙소에서 낮잠이나 자는 게 최고다. 몸이 찌뿌둥하다고 한 친구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나는 낮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잠옷으로 훌렁훌렁 갈아입었지만 이미 활동을 시작한 뇌는 쉬이 잠들지 못한다. 결국 다시 노트북을 켜고, 아주 오래전 끝내지 못한 글들의 목록을 살펴본다. 아, 이건 오늘 쓸 수 있겠는데 싶은 글을 하나 골라 쭉쭉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해가 질 때 즈음, 그러니까 다섯 시쯤이 되면 숙소의 옥상에 있는 수영장으로 향한다. 수영을 하기에는 좀 좁지만, 물놀이를 하거나 물에서 떠다니기에는 딱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진이 아주 잘 나온다 쿄쿄. 이런 숙소가 하루에 인당 15000원이라니, 참 물가라는 게 그렇지. 그렇게 물속에 발을 담갔다가, 물속에서 둥둥 떠다녀보다가, 같은 숙소에 머물고 있는 독일인 꼬맹이랑 물대포 전쟁놀이를 하다가 (독일인 꼬마와 이래도 되나?) 한기가 들 때 즈음에 수영장을 나선다.  방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고픈 배를 움켜잡고 해가 진 밖으로 나간다. 얼마 놀지도 않았는데 역시나 수중 활동은 칼로리 소모가 크다.


다시 구글 지도를 따라 평점이 괜찮은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다행히 영어로 메뉴에 대한 설명이 달려있는 곳이다. 치앙마이는 유난히 중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으로, 간판의 대부분에 한자가 적혀있고 점원도 중국어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영어 메뉴는 없어도 중국어 메뉴는 비치해둘 정도이니, 이곳이 얼마나 중국인에게 최적화(?) 되어 있는 곳인지 알 수 있다. 뭐, 나도 중국어를 할 수는 있지만, 한자를 읽는 건 힘들다고요!


요리 서너 개와 밥, 맥주를 시키고 나니 촛불을 켜준다. 내가 그것을 보고 "쑤에이.(예쁘다)"고 하자 점원이 뭐라 뭐라 한다. 네?라는 얼굴로 쳐다보니 촛불을 가리키며 쑤에이, 그러고는 다시 나를 가리키며 쑤에이, 한다. 성조만을 놓고 봤을 때, 저게 예쁜 거보다 네가 더 예뻐,라고 한 것 같다. 어머나 언니 컵쿤카(고마워요)♥


낮에 덥혀진 공기가 한적한 바람이 되어 분다. 덕분에 금방 미지근해진 맥주를 마신다. 탄산도 거의 없고, 맹물 같은 맥주 주제에 제법 취기가 오른다. 이것은 취기인가 더위인가. 미안, 나도 그냥 드립 한 번 쳐봤어. 저녁을 먹고 길거리를 따라 주욱 늘어진 노점상들을 따라 숙소까지 흔들흔들 걷는다. 그런 나를 보고 택시, 택시를 외치는 아저씨들에게 고개를 저으며 갈길을 간다. 아저씨, 저는 그 돈으로 까까 사 먹을 거예요. 하지만 길을 건널 때만큼은, 신호등이 없는 사 차선 도로를 건널 때만큼은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이런 대에서 다치면 나만 손해야. 그리고 길을 건너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흔들흔들 걷는다.


숙소에 돌아와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빨래를 돌린다.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쏙 들어가 눕는다. 킹사이즈 침대. 끝에서 끝까지 다섯 바퀴를 구를 수 있는 커다란 침대에 새하얀 이불에 폭 파묻혀본다. 아까 일시정지된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문자를 한통 보내보니, 또 바로 답장이 온다. 역시 이 두 시간 차가 제일 좋다니까. 게다가 이 친구는 내가 답장이 늦으면 섭섭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녀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주 된 대화 내용은 저 멀리 한국에서조차 꺼내지 않았던 오래전 이야기 같은 것이다. 우리는 대화를 또 나누고, 또 나눈다. 덕분에 오늘도 서로에 대해, 그리고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잘 파악한다. 두 시간 가까이의 대화가 끝나면 어느새 한밤중, 나도, 친구도 슬슬 잠이 쏟아진다. 잘 자, 그러고는 금방 잠에 빠져든다.


이상이 나의 상세한 나의 하루 스케줄이다.



한국에서의 나의 삶은, 규치적이라면 역시나 규칙적이었다.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다시 밥을 먹고, 밤늦게 잠이 든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루틴 안에 사는 삶에서 색다른 자극을 찾기 위해 타인의 포스팅을 보았다. 그래서 글 한 줄 쓰고 페이스북에 들어가고, 선 하나 긋고 인스타그램에 들어가곤 했다. 누구한테 연락 좀 안 오나, 하고 메신저를 뚫어져라 쳐다본 적도 있다. 노트북으로는 넷플릭스를 켜놓고 휴대폰으로는 SNS를 하는 동시에, 아이패드로는 원고를 하는 그런 동시다발적인 자극이 있어야지만 일을 할 수 있었던, 그때는 어느새 요원하다.


겨우 풍경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가는 카페가 매일 다를 뿐인데, 나는 더 이상 그런 자극이, 그런 산만한 자극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자극이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위에도 쭉 썼지만 지금 만의 생활은 아주 평온하고, 규칙적이고, 게으르기까지 하다. 그리고 한국에 가면 다시 그 루틴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느긋한 자극이 좋다.


그런데도 이런, 지금도 이렇게 글을 쓰고 앉아있네! 아, 정말이지 나는 게으르기는 글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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