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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Jan 15. 2020

슬럼프인지, 번아웃인지._01

에세이 담당자님이 들으면 기절초풍 할 말이지만, 요즘 글이 안 써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른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텅 빈 수도펌프와 같다. 

왜, 근대문학에 자주 등장하던 그거 있잖아. 손잡이 달린 파이프 깡통 같은 거.


요즘도 농촌에 가면 쓰지는 않아도 모양은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수도펌프의 원리는 파이프 안을 진공상태로 만들어 기압에 의해 물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콸콸. 그래서 펌프 윗부분에는 공기가 통하는 것을 막을 물이 늘 어느정도 필요한데 오랜 기간 쓰지 않으면 이 물이 말라버린다. 그래서 다시 사용할 때, 펌프의 공기 마개 역할을 할 한바가지의 물을 붓는데 이것을 마중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마중물 마저 말라버린 것 같은 상태이다.




사실 지금의 나는 크게 좋은 것도 없고, 크게 싫은 것도 없고, 화나는 일도 즐거운 일도 없다. 말그대로 희노애락이 없는, 양념하지 않은 무말랭이 같은 삶을 살고 있다. 그것도, 여름 무로 만든.


<썅년의 미학>을 처음 그렸을 당시에는 화나는 일이 참 많았다.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화딱지가 나서 안 그리고는 못베겼고 안 쓰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단 몇자라도 써야했고, 쓰다보면 글이 길어졌다. 참 술술 나왔다. 연재 중에 외주가 막 들어와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사람 만나는 것도 참 좋아해서 반짝반짝 꾸미고 모임도 많이 나갔고, 사람을 만나면 몇시간이고 떠들 수 있었다. 술 한방울 안마시고도 수다 떠느라 다음날에 들어간 적도 있고, 연애도 참 열심히 했다. 그런데 지금은 다 싫다. 귀찮다. 해야 할 일이 있어도 맨날 해야하는데, 해야하는데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몸이 안움직인다. 아니, 이제는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언젠가 친한 오빠가 그랬다. 

서영아, 불씨가 조금이라도 살아있어야 해.
그 불씨가 죽어버리면 아무리 휘발유를 부어도 안되는 거야.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꺼져갔을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냥 노화인가, 만약 그렇다면 너무 슬플 것 같다.


요즘에는 그 좋아하던 덕질도 안한다. 외국에 뮤지컬도 보러 다니고, 만화 행사도 참가하고 팬계정도 운영하고, 참 열정적이고 알아주는 덕후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뭘 보던 그냥 밍숭맹숭하다. 조금 보다가 지치면 끈다. 가끔 예전 것을 재탕해도 그때 그 느낌이 아니다. 여행도 지겹다. 뭘 봐도 신기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그냥 마냥 쉬고 싶다. 벌써 석달이나 쉬었고 당장 해야할 마감이 (거짓말 안하고) 수십개인데 마냥 쉬고만 싶다. 하지만 동시에 쉬는 게 무서워 또 이 시간까지 깨어있다. 이래놓고 또 오후 두어시에나 비척비척 일어나 다시 컴퓨터 앞에 앉겠지...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식사를 한 후 글을 쓰고, 오후에는 쉬고, 저녁에는 음악을 듣는 루틴을 영위해야 오래 갈 수 있다는 거, 나도 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기도 귀찮다. 


다시 촉촉해지고 싶다. 이 목마름을 채우고 싶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는 그걸 원하는 마음조차 사라진 게 아닐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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