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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서영 Jan 16. 2020

슬럼프인지, 번아웃인지._02


언제부터 이런 조짐이 보였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전업작가를 하기로 마음먹은 시점이 아닌가 한다.


여러분, 작가가 이렇게 해롭습니다.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부업으로 웹소설을 썼을 때는 이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에게 글과 만화는 현실의 삶을 잊게 해주는 마약 같은 것이었으니까. (국가GA 허락한 YOU일한 마藥...☆) <그리고 또 그리고>에서 히가시무라 아키코 선생님도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인간이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꿈을 좇는 존재라고.


<그리고 또 그리고>, 히가시무라 아키코. 스포가 될만한 내용이라 가렸습니다.


하지만 취미가 곧 일, 소위 '덕업 일치'를 하게 되면서 나의 인생 만족도는 사실상 곤두박질쳤다.


이제야 말하건대, 사실 마감 자체가 힘들지는 않았다. 콘티를 짜고, 대사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은 퍽 즐겁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걸 하지 않는다면 먹고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같은 것에 늘 쫓겼다.


업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실 회사에는 마감이 없다. 대부분이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고, 오늘의 내가 하지 않은 일은 내일의 내가 해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누군가 땜빵을 해주거나 대타를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마감기한이 있는 원고는 다르다. 늘 새로운 결과물을 내야 하고, 오늘의 마감을 지키지 않으면 내일의 내가 먹을 밥이 없으며, 내가 안 하면 아무도 할 수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회사는 어쨌든 회사에 출근해서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만으로 (잘리지 않는다면) 매달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들어오지만 원고료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과 비례하지 않으며, 그것마저도 제각각 들어온다. 이번 달에는 백만원을 벌었어도 다음 달에는 한 푼도 벌지 못할 수도 있다는 소리다. 게다가 4대 보험이 안되어서, 지역가입자로 '직장이 없어도 돈을 벌 수 있으니' 건강보험료는 엄청 뜯어가면서 '직장이 없어 돈을 벌지 못하니' 대출은 받을 수 없다.

말그대로 내 몸뚱아리 하나가 재산의 전부인 셈이다.


그뿐인가, 예전에는 즐겁게 읽기만 했던 만화나 소설도 아, 나였으면 이런 대사를, 이런 연출을 하지 않았을까 하며 머릿속에서 요리조리 궁리를 하느라 도통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혹은 내가 겪는 모든 일의 판단 기준이 이것을 작품의 소재로 쓸 수 있는가, 없는가로 정해지기도 했으며, 나와 비슷한 연배의, 비슷한 작풍의 작가를 보면 늘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모든 것이 일로 연결이 되니 재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그리는 작품의 주제는 페미니즘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페미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어떤 콘텐츠를 보면, 그것을 즐기기보다 한 발자국 물러나 그것이 페미니즘적으로 얼마나 옳은지를 판단하고 있었다.


물론 작품을 보는데에 있어 페미니즘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은 중요하고, 지금의 시대 양상에 뒤떨어진 작품을 보지 않거나 (성)범죄자의 작품을 소비하지 않는 일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작품 그 자체로의 재미가 아닌, 자꾸만 그 작품이 가지는 의의와 도덕적 무결함만을 소비하려는 내가 있었다.


콘텐츠뿐만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도 그 의도를 판단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스스로에게는 더 엄격해졌다. 그래서 머릿속에는 늘 여러 가지 생각이 떠돌았고, 뇌가 쉬지를 못하니 늘 신경은 날카로웠다.


게다가 애초에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던 만화였기에, 회차를 거듭할수록 더욱 고차원적인 이야기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하지만 내 작품은 4컷 만화가 아니던가. 물론 4컷이 아니라 단 한 컷만으로도 풍자와 해학이 가득 담긴 농도 짙은 만화를 만드는 천재 같은 작가님들도 계시지만, <썅년의 미학>으로 뽑아낼 수 있는 내 능력은 딱 책 두 권까지 였다. 솔직히, 80화를 연재했을 즈음이 아마도 한계였던 것 같다. 때마침 첫 책의 후속작인 <썅년의 미학+>의 단행본 준비를 핑계로 휴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정말 나를 힘들게 한 일은, 내가 연재를 재개한 후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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