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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Nov 13. 2023

죄책감 갖지 않게

4번 연속 마라탕 먹는 남자  

천재는 나름 꽤 많이 배운 지성인이고 책도 많이 읽었으며 암기력이 비상해 인간 백과사전 같다. 그러나 그의 감성과 말에는 소년 같은 담백함과 순수함이 자주 드러난다. 우리의 대화하는 모습을, 얼굴을 모자이크하고 목소리를 변조해서, 누군가 시청한다면 흡사 2명의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 같을 것이다.


얼마 전 천재와 함께 짬뽕밥과 반반세트인 탕볶밥(탕수육과 볶음밥)을 먹기로 했다. 늘 그렇듯 함께 메뉴를 정해놓고 내가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그런데 막상 배달온 음식은 마라탕이었다. 직전에 3번을 연속으로 먹었던 메뉴였다. 참고로 천재는 필이 꽂이면 최대 3번 연속까지는 동일한 메뉴를 먹곤 한다. 그러나 4번 연속 마라탕은 좀 무리다, 그에게도.

 

나는 순간 다른 주소로 잘못 온 배달인 줄 알았다. 그러나 배달앱을 보니 내가 재주문 버튼을 잘못 누른 것이었다. 나는 배달온 음식들을 비닐 봉다리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며 귀여운 척을 해보았다. 털썩 마음이 주저앉았다. 내 실수, 실책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내가 천재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눈치 보며 봉다리만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다가와 말했다.


"네 번째로 연속 도전을 해보지 뭐. 괜찮아. 자, 앉아서 먹자. 식기도를 합시다."


보통은 내가 식기도를 권하면 천재가 대표로 기도하는데, 이 날은 본인이 자청해서 식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클레어가 메뉴 선택에 죄책감 갖지 않게 도와주시고.."


순간 기도하다가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이런 대목에서 '죄책감'이란 단어를 쓰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책감이란 단어가 적절한 상황이기는 했다.


천재는 내가 꼼꼼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란 걸 알고 있다. 직장에서 업무 볼 때는 실수를 거이 하지 않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실수투성이인 것도 잘 알고 있다. 내가 여기저기 할 일이 많고, 이 사람 저 사람 챙기다 정신없이 녹초가 된다는 것, 그런 나를 입체적으로 잘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천재는 말이다.  


그 며칠 전에는 천재네 집 선풍기를 옮기다가 그만 날개 머리 쪽이 푹 빠지더니 선풍기 목부문이 아예 부러지고 말았다. 내가 선풍기 한대를 말아먹은 것이다. 천재 어머니는 살아 생전 워낙 검소하셔서 세탁기도 30년을 쓰셨고 이 선풍기도 최소 10년은 넘게 쓰신 듯했다. 선풍기를 망가뜨린 것도 미안하지만 어머니와 추억이 담긴 가전제품 중 하나이기에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그때도 천재는 이참에 선풍기 새로 주문하자 했고 얼마 안 있다 새로운 선풍기가 도착했다.





그날 천재는 마라탕을 더없이 맛깔라게 먹으면서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어떻게 4번 연속 마라탕을 주문할 생각을 했어? 오늘도 (대개) 맛있다!"


마치 마라탕을 아주 오랜만에 처음 먹는 것처럼, 천재는 그날따라 그릇을 더욱 깨끗하게 비웠다.


천재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칭찬에 인색했고 학교성적에 따라 유일한 피붙이인 외동아들을 차별했다 한다. 아들이 반에서 1등을 해도 전교 1등을 못 하면 싸늘하게 얼굴이 바뀌고 지적이 날아왔던 것이다. 천재는 이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성적 강박에 남몰래 시달렸고, 어른이 되어서는 우울증을 포함한 여러 강박증과 병들을 상처로 떠안야 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오늘도 가끔 그를 괴롭히는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기에 지적이 익숙할 만도 한데, 천재는 나를 지적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통 사람은 보고 들은 대로 살아지기 마련이건만 아버지와 달리 살려했을 때, 그가 자신과 씨름했을 포용력의 크기는 다른 사람들의 수배였으리라.   

 

그날 자신이 질린 음식을 먹으며 힘들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실수해서 절절매는 나의 마음을 읽어내느라 안간힘을 썼을 마음씀이 뭉클했다.


천재는 지식은 많지만 허투루 지식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는 절제가 빛나는 사람이다. 자신이 좀 더 가진 것들로 상대방이 박탈감을 느낄까 봐, 그의 오랜 죽마고우에게 가끔 좋은 소식을 전할 때면, 그가 열등감을 느끼지 않도록 고심한 후 통화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자주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는 지식의 독을 해독하는 법 곧 이해와 사랑을 잘 배워가는 것 같다. 또 무엇인가 배우면 삶에서 바로 실천하려는 수용력이 어린아이처럼 고운 사람이기도 하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전서 8장 1절 b)











※저희 짝꿍 천재(가칭)는 브런치 작가활동은 전혀 하지 않아요. 비슷한 필명'들'에 헷갈리지 마셔요 :)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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