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보리굴비의 계절. 설날 큰언니가 비싸다던 보리굴비를 직배송으로 아주 저렴하게 네댓 마리 샀다 한다. 언니는 대뜸 천재에게도 보리 굴비를 갖다 주라 말했다. 생각해 보니, 한참 전에 천재가 보리굴비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터였다.
그런데 이 좋은 선물 앞에서 덜컥 좋다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실 난 생선을 잘 못 먹는다. 어렸을 때는 밥상에 생선요리만 올라가도, 비린내에 아예 밥을 못 먹을 정도였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상 밑에다 미니 밥상을 차려, 나와 함께 쭈그려 밥을 드셔 주시곤 했다. 중. 고등학교 돼서야 참치캔과 갈치 튀김 정도는 먹을 수 있게 됐다. 직장 회식 때도 생선회나 동태탕 정도만 겨우 참고 먹는 수준이었다. 당연히 내 손으로 생선을 다듬고 요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보리굴비가 아주 비싼 것은 50,000원도 넘는 것이 있다는, 나름 귀족종인 생선종류라니 순간 욕심이 불끈 올라왔다. 천재에게 바로 카톡을 해서, 보리굴비 먹을 거냐고 확인차 물어 보았다. 천진난만한 짝꿍은 배려와 열의를 담은 답톡을 바로 주었다.
"설거지 시로"
난 남자에게 설거지는 거이 시키지 않는다. 특히 천재에게는 말이다. 그렇기에 이 말은 내가 설거지하기 불편할 텐데 괜찮겠냐는 질문인 것이다. 나는 설거지는 당연히 내가 할 거라 말했다. 그러자 그의 본심이 짧은 단문으로 서둘러 '까똑' 폰 화면에서 뛰쳐나왔다.
"그거 맛있어"
설날 천재와의 카톡 대화 내용
이것을 진퇴양난이라 하던가. 나는 득템의 득의 함과 동시에 난감이 비치는 어정쩡한 미소로, 보리굴비님을 비지백에 받들어 모셨다. 그리고 바로 천재네 집으로 고고씽 출발했다.
천재네 도착하자마자, 그는 정말 보리굴비를 가져왔다며, 신기한 듯 미소 가득 계속 굴비를 쳐다보았다. 나는 대뜸 말했다.
"이거 바로 요리해 줄까?"
"힘들 텐데 괜찮겠어?"
"요리가 뭐가 힘들어. (바로) 해줄게"
난 늘 그렇듯 닥칠 일을 걱정하기보다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난감했다. 나는 참치캔을 이용한 김치찌개를 빼고는 생선요리는 이번이 생애 처음인 것이다. 뭔지 모를 비린내에 벌써부터 신경이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이 징그러운 바다 괴물을 손으로 만져야 한다는데 생각이 이르자, 바다 멀미가 올라 오려했다. 부엌에서 보리굴비를 싱크대에 모셔 두고 향방 없이 굴비와 눈싸움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눈치가 없으신 건지, 우리의 천재님이 거실에서 외마디를 외치신다.
"아, 근데 오늘 보리굴비는 어렵겠다. 자기 피곤하잖아. 보리굴비가 (다듬기가) 상당히 복잡하네. 비닐도 다듬어야 하고."
천재는 내가 생선을 안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요리를 만류하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더 이상은 물러 설 수 없다는, 결의에 차 있던 터라, 그 말에 냉큼 호기롭고도 당차게 대답했다.
"아니야, (큰) 언니가 그냥 물에 담갔다 찌기만 하면 된다 했어"
"여기 유튜브에는 (절차가 복잡하다) 그러는데?"
"이건 다듬어져 포장된 굴비잖아.(괜찮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포장된 굴비도 생선 비늘은 한번 더 다듬어야 했었다. 그러나 뭔지 모를 고집과 장난기가 발동하였다. 그래 굴비를 포장된 비닐봉지 채로 들고서, 부엌 쪽으로 다가오는 천재를 향해 천천히 돌진했다. 그리곤 포장된 굴비의 눈머리를 천재의 얼굴 눈쪽에 바짝 갖다 들이밀며 말했다.
"넌 지금 보리굴비에게 모욕감을 주었쪄!"
"왜애?"
"다 다듬어져 나온 굴비에게 왜 그래?"
"...."
그리곤 어안이 벙벙해진 천재에게 더욱 힘주어 말했다.
"어서, 굴비에게 사과해"
"어어.. "
그러자 천재는 얼떨결에 고개를 살짝 숙이는 시늉을 하며 굴비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럼 됐오!"
굴비를 고이 두 손으로 바쳐 모셔서 다시 싱크대 위에 두려는 찰나, 검은 그림자가 덤벙덤벙 다가왔다. 그리고는 순간 흑화된 천재가 말했다.
"자기 이상해!"
"뭐라고 했지?"
예이 올 것이 왔다. 우린 초딩처럼 손바닥 씨름에, 얼굴 뭉개기를 번갈아 하며 웃음이 폭발했다. 더 이상 힘으로 이길 수 없다 여긴 내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근데, 왜, 뭐가 억울한데?"
매번 말로는 져주고 미련을 못 버려 몸동작으로 저항하는, 천재의 루틴한 파닥거림에 소명의 기회를 준 것이었다. 천재는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어, 그런데 억울한 표정이네?"
천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거실 쪽으로 가면서 연신 혼잣말을 했다.
'씨, 내가 왜 사과한 거지'
나는 뭐에 홀린 듯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곤 혼잣말을 연기하듯 독백하는 천재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사랑은 현혹되는 것, 홀리는 것, 져주는 것. 천재는 사랑의 주도권을 아래로부터 쟁취하는 법을 잘 익혀가고 있었다.
그날 천재는 보리굴비 찜요리를 녹차물에 말은 밥과 단번에, 깨끗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굴비를 요리한 클레어는, 엄마와 같은 미소로, 깨끗하게 비운 그릇들을 보며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