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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 클레어 Sep 21. 2023

잠깐씩 입혀지는 옷들

브런치 Day 43일의 소회 feat<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023년 9월 21일(목) 시원해지며 맑음


브런치를 시작한 지 Day 43일째이다. 오늘까지만 날짜를 헤아리려 한다. 촌스럽지 않게 말이다.


오늘 문득 아래 옷걸이 동화가 떠올랐다. <자기 존재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자각 그리고 초심, 본질을 지키는 것> 내가 인생 살면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 중 하나이다. 옷걸이에 걸쳐지는 밍크나 작업복이 내가 아니라. 나는 그저 또 늘 옷걸이이고 그 본분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아름다움이라고 말이다.      


세탁소에 갓 들어온 새 옷걸이한테 헌 옷걸이가 한마디 하였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말길 바란다."
"그런데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시는지요?"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마치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들을 그동안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출처 :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라>  



내가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 평소 되도록 검소히 살고 싶어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혹자는 또순이처럼 절약해서, 돈 모아 집 사고 거부가 되려나 보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근데 또순이가 되기에는 내가 너무 퍼주기에 이미 실격이다. 그보다는 잠깐 입혀지는 화려한 옷들이 자기인양 착각하는 것. 나는 그런 우둔함에 빠질 수 있는 나 자신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절대자 앞에서 태생부터 티끌 같은 존재이며,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 내 삶의 습관과 스타일은 그것을 스스로 각성하고 환기하는 여러 장치 중 하나랄까.  


굳이 유창하게 말하자면 <초심을 지키고 싶다>로 수렴할 것이다. 세상에는 성공하고 유명해진 후에 변질되고 나락으로 떨어져 패가망신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래서 재야의 고수 내지는 내공이 탄탄하여 세상에 그 무엇에도 휩쓸려 가지 않는 위인들이 내 롤모델이었고 나도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가 속한 봉사모임ㅡ규모가 상당히 크다ㅡ에서 모임신문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해도 여러 번 고사했다. 독자만 수만명일 수 있는데 말이다. 지금 직장에서도 대표님께서 모 매체를 통해 인터뷰하도록 권장하셨지만 그것도 고사했다. 조심스럽지만 사실 브런치 시작하고도 두 번의 제안이 있었지만 다 고사했다. 심지어 내 봉사모임에서는 내 직장이 어딘지, 내 퍼포먼스가 어떤지 대부분 모르신다. 10년 넘게 다닌 봉사모임인데도 말이다.



그러면 누군가 물을 것이다. "그렇게 드러나기 싫고 조용히 살고 싶다면 브런치를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는가?" 맞다. 그것이 브런치 가입만 하고 수년동안 작가신청을 하지 않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조용히 내 소임만 하며 살고 싶다는 소원과 달리 주위에서 거듭 권유를 하셨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카운슬링(상담)의 재능이 말과 글에 드러났던지. 주변인들 때론 오늘 처음 만난 사람조차  “힐링이 된다”, “혼자 듣기 아깝다”, “좀 더 큰 모임에서 얘기를 해주라”,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해봐라”, “작가를 꼭 해봐라”는 것이다. 한두 번이면 그냥 립서비스로 지나갈 텐데. 자꾸 그런 말을 들으니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하나님이 주신 나의 재능을 낭비하고 썩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이다. 동시에 나의 도움을 조금 받고도 힐링되고 회복되고, 심지어 나와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수면제를 끊게 된 분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제비 뽑기하는 마음으로 작가신청을 ‘즉흥’이란 형식으로 제출한 것이다. 만약 이렇게 신청했는데 덜컥 작가가 된다면. 내 재능을 글의 형식으로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라는 절대자의 뜻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그런 속생각이 있었던 것도 같다.       


요즘 구독자수가 조금씩 늘고 브런치로 삶이 좀더 분주해지며 과부하가 될까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무엇보다 인생의 초심을 지키며 살고 싶은 내 소박한 소원이 무디어지면 어쩌나 우려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최근에 읽은 오디오북의 한 예시가 떠올랐다. 아래는 그 책의 예시다. 나는 공자나 노자 신봉자는 아니지만 고전은 인류의 지혜가 담긴 책인 것을 생각하며 공유한다.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은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배우기 위해 사절로 낙양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노자를 만났다. 이때가 대략 기원전 519년으로 공자는 40대 초반의 젊은이였고 노자는 이제 80대가 된 원숙한 노인이었다. 자료에 따라서는 공자를 40대, 노자를 60대로 설명하기로 한다. 공자는 그 무렵 예에 대한 학식으로 이미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노자는 오래된 문서를 관리하는 사관이었다. 주나라에 머물며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노자를 대면하게 된 공자는 공손한 태도로 노자에게 물었다.

 “예란 무엇입니까?”

 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략-
군자는 때를 만나면 수레를 몰고 거들먹거리지만 때를 만나지 못하면 티끌처럼 누추하게 떠돌아다니게 될 뿐입니다. 내가 듣기로 진짜 훌륭한 장사꾼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물건은 깊이 감추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진정으로 덕이 있는 군자의 얼굴은 마치 어리석은 듯 보이게 됩니다. 당신은 교만과 욕심을 버리고 있어 보이는 얼굴빛과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이는 모두 당신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는가? 에둘러 말하니까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데, 실은 이런  말이다. “너 세상 구한답시고 여기저기 얼굴 알리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진짜 능력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다. 그리고 너 교만하고 욕심 많아 보이니까, 앞으로 조심해라.”

우리 같으면 집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분노의 눈물을 흘렸겠지만 공자는 그런 분이 아니셨다. 노자와 헤어진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새는 자신이 능히 날 수 있음을 알고, 물고기는 자신이 능히  헤엄칠 수 있음을 알며, 짐승은 자신이 능히 달아날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달아나는 것은 망에 걸리고, 헤엄치는 것은 낚싯줄에 걸리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에 맞는다. 용에 이르렀을 때에야 비로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음을 이제까지 알지 못하였다. 오늘 노자를 보며 마치 용을 본 것만 같았다.”

출처 :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노자와 공자는 서로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 만남을 필두로 각각 사상을 형성하여 2000여년 동안 동양사상의 큰 축이 되었다. 물론 이 예화가 팩트이냐는 논쟁도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서 전해오지만 노자가 공자보다 100년 뒤의 인물이란 설도 있다. 그럼에도 두 현자의 만남이 주는 잔잔한 감동에 의미가 있는 듯하다.


성경에서는 이를 한 줄로 간략히 표현하기도 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잠언 27장 17절)

     



바닷가재는 자기 성장을 방해하는 단단한 껍질을 벗기 위해 수없이 심해 바위 밑으로 들어간다. 그 심해의 바위 밑은 안전한 피난처다. 그곳은 과거의 껍질을 벗어내고 새로운 껍집을 덧입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곳은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곳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려가는 것, 비우는 것은 손해요, 낭비라 가르친다. 그러나 내려가야 심해의 바위밑을 만날 수 있다. 탈각을 반복해야, 더 크고 단단한 새 철갑 껍질을 얻어 올릴 수 있다.


나이가 늙어도 듣는 마음, 배우는 마음을 견지한다면 그는 늘 청년이라 생각한다. '청년 클레어'라는 필명에는 그런 의미도 담고 있다. 브런치에서 훌륭한 인생의 선배님들, 작가님들의 글들을 통해 내가 더욱 다듬어지는 기회로 삼는다면. 초심을 지키는 쓰임새 있는 옷걸이로 더욱 성장하리라 생각한다.















*그림,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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