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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Sep 06. 2020

푸른 수염의 변태

숨은 명소를 소재로 한 (스마트소설)


   푸른 수염의 변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옆 제본공방에서 수선한 책을 찾아왔다. 내가 맡긴 책은 1697년에 출간된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의 동화 <Blue Beard>였다. 300년이 넘은 책을 잘 보존해온 이유는 내가 이 책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가사 라울이다. 사람들은 나를 푸른 수염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오랜 세월 동안 먼지, 직사광선, 잦은 넘김과 면지와의 장력 때문에 표지 안쪽이 갈라졌다. 그 후에는 책등 표지가 떨어졌다. 급기야 속지를 묶은 실이 삭아 두 동강이 났을 땐 절망적이었다. 나는 책을 헌책방에서 운영하는 제본공방에 맡기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수선해 달라고 했다. 내가 그동안 끊임없이 변태 했듯이 내가 태어난 집도 상큼하게 수리를 하고 싶었다. 가죽 표지로 갈아입은 책은 세련된 디자인에 금색 제목이 돋보였고 무엇보다 고서의 품위를 잃지 않아서 만족스러웠다. 

  그녀와 첫날밤을 치르기 위해 면도했다. 까칠한 성격의 그녀는 까칠한 수염이 몸에 닿으면 바짝 긴장할 것 같았다. 말끔하게 면도하면 기운이 쪽 빠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얀 면도 거품과 잘린 푸른 수염이 범벅되어 세면대에 떨어졌다. 물을 틀자 면도 거품만 씻겨 내려가고 세면대에 푸른 수염이 파래처럼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수염을 자세히 보니 파랗던 것이 어느새 진한 청색으로 변했다. 수염의 색상은 눈금 같은 것이다.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지적인 욕망을 어떻게든 채울 때가 된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푸른 수염에 새치가 올라 왔다. 앞으로 50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벌써 새치라니. 새치가 보기 싫어서라도 푸른 수염을 말끔하게 밀어냈다. 

  나는 지식과 사유가 풍부한 여자를 찾아 끊임없이 배회한다. 나의 욕망 때문이다. 17세기 샤를 페로가 창조한 우리 조상들은 여성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유혹하는데 푸른 수염을 활용했다. 그 당시 푸른 수염은 정력의 상징이고 부의 상징이었다. 지금 푸른 수염을 기르고 다녔다간 유전병이 있거나 수염이나 염색하는 할 일없는 놈으로 치부될 뿐이다. 그동안 나는 인간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했다. 

  17세기 당시 프랑스 동화작가인 나의 아버지가 묘사한 우리 종족은 남성 권위를 내세우면서 여성을 짓밟는 살인귀로 등장했다. 아버지는 당시 여성들에게 남성 권력과 결혼에 관해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여성에게 결혼은 가부장을 떠나 새로운 가부장으로 편입되는 과정일 뿐이다. 그동안 나는 살인귀에서 흡혈귀로 진화했다. 살인행각에 흡혈본능이 가려져 있었는데 그것이 진화하면서 요상한 취향이 더해졌다.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여자의 피만 찾게 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피는 나에게 달콤한 마약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배회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흡혈본능은 예나 지금이나 악귀에 해당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석 달 전에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열리는 독서모임에 갔다. 함께 책 읽기의 즐거움을 알아가는 막막한 독서모임이었다. 도스토옙스키 5대 장편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에 해당하는 <죄와 벌>과 <백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은 그녀가 스카프를 풀더니 머리를 올려 묶었다. 하얀 목이 드러났을 때 나는 가슴이 뛰었다. 계속 그녀의 목덜미를 훑었다. 내 눈길이 따가웠는지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그녀는 내가 찾던 지적인 외모였다. 

  면도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으려고 5층 복도 끝 방으로 갔다. 상가건물 맨 위층에 자리 잡은 이곳은 드레스 룸이자 사생활이 완벽하게 보장되어야 하는 절대공간이다. 인간들은 내가 서울 변두리에 있는 건물주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지 모를 것이다. 가슴을 풀어헤치고 목걸이에 달린 열쇠를 꺼냈다. 목걸이에 달고 다니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묵직한 열쇠다. 열쇠를 구멍에 넣기 위해 한참을 더듬거렸다. 조금이라도 각도가 맞지 않으면 열쇠를 구멍에 넣을 수 없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열쇠는 구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경쾌한 스프링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드레스 룸 안쪽으로 커다란 냉장고와 공기청정기 그리고 습도조절장치가 있고 한쪽 벽에 피아노가 있다. 벽장을 열고 옷걸이를 정리하고 비닐을 씌워놓았던 570번째 미라를 빼냈다. 미라가 입은 웨딩드레스 자락이 길게 딸려 나왔다. 팥죽색으로 얼룩진 부분에 곰팡이가 살짝 슬어있었다. 작고 조그만 입을 벌린 채로 말라비틀어진 이 여자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만난 570번째 연인이었다. 미라의 작고 조그만 입속에 아픈 추억이 도사리고 있었다.

  571번째 연인이 된 지금의 그녀는 투명한 피부에 목이 길고 혈색이 좋은 여자다. 항상 표정 없는 큰 눈으로 내 5층 상가를 우러러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을 보면 저 너머의 세상까지 비쳐 보였다. 그 세상은 우리의 미래였다. 내가 청혼하자 그녀는 짐을 싸 들고 나에게 왔는데 아직 같이 잠을 자지는 않았다. 결혼식 전까지 나를 안달 나게 하려는 수작인 것 같은데 나는 섹스에 관심 없다. 그녀는 결혼 날을 잡자 인터넷으로 웨딩드레스를 주문하더니 매일 입어보며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에 취했다.

  570번째 미라를 벽장에 집어넣고 나니 현기증이 났다. 냉장고를 열고 검붉은 액체가 담긴 비닐 팩을 꺼낸 다음 포장을 뜯었다. 라벨에 찍힌 날짜는 유효기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동양철학을 좋아했던 569번째 연인의 피였다. 검붉은 액체를 커다란 와인 잔에 따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리는 지적인 욕망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두 손으로 와인 잔을 쥐고 검붉은 액체를 들이켜는데 딸깍 소리가 났다. 이런, 깜박하고 문을 제대로 잠그지도 않은 것이다. 와인 잔을 그대로 입에 댄 채 뒤를 돌아봤다. 와인 잔 안쪽에 발린 검붉은 액체가 점점 엷어졌다. 그녀는 문을 반쯤 열고 고개를 디밀더니 방안으로 천천히 들어왔다. 순간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녀에게 오층 복도 맨 끝 방에 절대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여자가 금기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것은 샤를 페로의 동화 <Blue Beard>에도 나오는 이야기다. 동화는 애들만 읽는 것이 아닌데 책을 사줘도 안 읽는다. 내가 만난 여자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 방안에 들어온 그녀는 눈부시게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류를 들고 있었다. 

  “얼마나 좋은 거길 레 감춰두고 혼자 먹는 거야? 나도 맛 좀 봐.”

  나는 혀로 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잇새에 끼었던 침전물에서 떫은맛이 났다. 

  “당신은 내가 정한 금기를 어겼어!”

  그녀는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거 읽어 보고 사인 좀 해줘.”

  “나중에 볼 게 지금 바빠. 당장 여기서 나가.”

  그녀가 성큼 다가와서 와인 잔을 빼앗으려고 했다. 내가 와인 잔을 잡아당기는 순간 검붉은 액체가 그녀의 웨딩드레스에 쏟아졌다. 나는 와인 잔을 버리고 그녀의 목을 졸랐다. 와인 잔이 깨지면서 검붉은 액체가 사방에 튀었다. 내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목을 졸랐다.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눈의 실핏줄이 일어나 나를 휘감을 듯했다. 나는 울먹이면서 말했다.

  “이까짓 와인이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야. 넌 나와 약속을 어겼어!”

  그녀의 동공이 풀렸다. 어깨의 힘이 빠졌다. 손을 놓자 그녀는 맥없이 쓰러졌다.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고막이 팽창하면서 심장 박동을 그대로 전했다. 심장 박동이 한 박자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책상에 앉아 진정한 다음 그녀가 건넨 서류를 보았다. 혼인신고서와 5층 상가를 부부공동 명의로 변경하기 위한 서류였다. 이런 발칙한 생각을 했다니 그녀가 금기를 어긴 게 천만 다행이었다.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를 책상에 눕히고 국부조명을 켰다. 어깨까지 곧장 흘러내렸던 새카맣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반사되어 오묘한 빛깔을 냈다.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볼록렌즈가 된 듯 그녀의 머리가 기괴하게 커 보였다.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송곳니를 키워 그녀의 경동맥에 찔러 넣었다. 그녀가 식기 전에 피를 모조리 빨아 먹었다. 맛이 별로였고 쉰내가 났다. 그녀는 문학소녀였고 주로 소설을 읽는다고 했는데 사실이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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