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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Sep 06. 2020

핑크의 환생

숨은 명소를 소재로 한 (스마트소설)



 핑크의 환생


  헌책방 ‘살롱 도스또옙스끼’에 들어서는 순간 이야기 속으로 빠져든다. 어느 인물이 소장했던 헌책을 놓고 벌이는 탐색담이다. 헌책을 사서 보면 그 책을 소장했던 사람과 내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같다. 헌책의 상태를 보면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어떻게 놓여 있었는지, 독서 습관은 어땠는지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한 주에 한 번은 헌책방에 들러 여행이나 사진 관련 책을 사다 보니 단골이 되었다. ‘살롱 도스또옙스끼’ 사장은 왕년에 글 좀 써본 작가라는 티가 한마디 한마디에 묻어 나와서 그런지 도도했다. 그의 인상은 미소년처럼 곱상해서 매력적인데 다만 코가 핑크빛으로 익은 딸기 같았다. 퇴근하면 매일 저녁 겸 술상을 차려 마신다는데 아마 그 때문인 듯했다. 

  ‘살롱 도스또옙스끼’는 문학전문 헌책방이다. 사장의 주장은 헌책방을 방문한 고객에게 문학적 예술적 세례를 주고 싶다고 했다. 또한 그는 옛것에서 지혜를 구할 수 있고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곳에 가면 나는 녹색의 기운을 느낀다. 식물원의 풀 냄새가 나는 것 같고 헌책 하나하나가 광합성을 하는 것 같았다. 소설책을 뒤적거리며 내가 젊었을 때 문학청년이었다고 하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문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말했다. 

  “문학 하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문학이 진짜입니다.”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사장이 말하는 동안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가느다란 빛줄기에 공기 중의 먼지가 후광처럼 맴돌았다. 그가 언급한 대문호들의 작품을 읽어 보지 못해서 열등감이 일었다. 순간 떠오른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였다. 그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책 중 유일한 소설책이었다. 그 책을 ‘살롱 도스또옙스끼’에 팔기로 했다. 제대로 읽어 보지 않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를 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 헌책방은 상호가 ‘살롱 도스또옙스끼’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이 몇 권 없었다. 

  집에 와서 자기개발서와 광고 마케팅 관련 서적 그리고 시사 잡지 사이에 숨어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찾아냈다. 그 양장본 책머리에 검지를 걸어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서 옆의 책을 먼저 끄집어낸 다음 그 책을 안전하게 꺼냈다. 오랜 세월 햇빛이 닿은 책등이 빨강에서 핑크빛으로 바래었었다. 혹시 책 속에 감춰둔 지폐는 없는지 살펴보는데 사진이 나왔다. 사진은 가름끈처럼 책의 속살 깊이 숨어있었다. 맑은 날 야외에서 찍은 사진은 하늘이며 나무, 피부색까지 모든 게 지나치게 선명했다. 사진 속 그녀의 얼굴은 환한 핑크빛으로 빛났다. 깜짝 놀란 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 그리고 살짝 미소 짓는 입술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명함만 한 그녀의 사진 뒷면에 ‘인간의 적나라한 어두운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책을 선물하며 자신의 사진을 책갈피로 제공한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 연결되었다. 그녀는 나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꿰뚫어 봤던 여자였다.  

  그녀는 항상 핑크빛으로 발광했다. 우리의 눈 속에는 일종의 빛이 들어 있다. 외부로부터 미세한 자극이 들어오면 빛에 의해 색채의 충동이 일어나 특정 색이 나타난다. 일종의 심리 색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 색은 외부에서 충격을 받았을 때 눈의 작용과 반작용 때문에 생긴다. 심한 충격을 받으면 새하얗게 질리거나 새파랗게 겁을 집어먹는 일도 있으니까. 그녀가 핑크빛으로 보인 것은 내가 그녀에게 홀딱 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친척 집에서 자랐다. 삼촌 집에는 친할머니가 계셨다. 진한 핑크로 기억되는 할머니는 포근한 에너지원이었다. 진한 핑크를 보면 점점 시커메졌던 할머니의 외음부가 떠오른다. 나는 어린 시절 노환으로 집에서 시름시름 앓던 할머니를 보살펴 드렸다. 화장실까지 갈 힘이 없어진 할머니는 요강에다 볼일을 봤다. 할머니를 부축해서 요강에 앉힐 때 말라비틀어진 성기를 봤다. 진한 핑크를 감싼 시커먼 외음부는 꺼져가는 불빛 같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갑자기 출구가 닫혀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답답한 어둠 속에서 불빛을 찾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촌 집을 나왔다. 대학 졸업 후 취직하고 삼촌 집에 갔을 때 숙모가 보관했던 엄마의 유품을 건넸다. 열여섯 살 이후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은 상자 안에는 엄마의 일기장이 들어 있었다. 가슴 아픈 사연 사이사이에는 빨간 꽃잎이 종이를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여 놓았다. 빨간 꽃잎의 물이 하얀 종이에 스며들면서 연한 핑크빛으로 변한 것이다. 꽃잎을 보자 내가 살았던 친척 집의 화단이 생각났다. 샐비어, 장미, 채송화가 답답한 가슴을 터트린 것처럼 일기장에 눌려 있었다. 일기장에는 나의 성장 과정,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쓰여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여린 사람이었다니.

  아무도 없는 회의실에 신입 디자이너였던 그녀와 단둘이 있었다. 회의실 불을 끄고 프로젝트를 켜고 그동안 같이 작업한 광고 시안을 넘겨보았다. 그녀는 며칠 동안 밤을 새워 나의 아이디어를 환상적으로 표현하였다. 다음날 거래처에 가서 프레젠테이션할 내용을 점검했다. 광고 시안 점검을 마치고 나는 그동안의 수고와 애씀에 관해 칭찬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일 때 강렬한 프로젝트 조명을 받은 그녀가 핑크빛을 발산했다. 아이스크림 광고 시안의 배경 컬러가 핑크였기에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당겼고 우린 테이블을 사이 두고 키스했다. 스크린에 우리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키스를 끝내고 자리에 앉는 순간 회의실 블라인드 사이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과 마주쳤다. 아내가 야근하는 나를 놀래주고 싶어서 야식을 사 들고 몰래 찾아온 것이다. 파티션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아내는 불같이 달아올랐다. 아내의 몸속에서 불이 분출하여 자신을 새까맣게 태우더니 갈라졌다. 그 속의 불빛이 나를 흔들었다. 할머니의 진한 핑크빛, 엄마의 연한 핑크빛이 나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온몸이 빳빳하게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사죄했다. 물어보지 않았다고 내가 기혼자란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었다. 

  중년을 넘긴 지금은 핑크는 사라지고 빨강이 다가왔다. 피로할 때 단 게 당기듯이, 기운 없을 때는 양귀비를 찍은 사진 책을 감상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에 양귀비꽃이 피었다. 양귀비꽃이 연두와 녹색의 평원에 만발한 모습은 마치 강물이 굽이쳐 흐르는 듯하다. 양귀비꽃이 물결이 되어 평원을 가로지른다. 붓으로 점을 찍듯이 단순하게 묘사한 듯한 양귀비꽃을 보고 있으면 내가 꽃들 사이에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어느새 양귀비가 되어 녹색의 양분을 먹고 빨간 에너지를 발산한다. 사진에는 녹색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빨강과 녹색의 보색 대비를 사용할 때는 빨강의 면적이 녹색보다 많은 것이 효과적이다. 녹색이 숨통의 역할을 해준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의 먼지를 털어낸 다음 책을 들고 ‘살롱 도스또옙스끼’에 갔다. 도도한 헌책방 사장은 책을 보고 반색했다. 

  “다 읽어 보셨나요?”

  “그럼요. 인간의 적나라한 어두운 본질을 가장 정직하게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이죠.” 

  내 말을 듣고 입을 다물지 못한 사장은 온라인 중고책 가격을 검색하더니 매입가를 제시했다.

  “그냥 기증하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 소설을 읽고 나처럼 깨달음이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사장은 도스토예프스키의<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입구에서 제일 잘 보이는 책꽂이에 꽂았다. 멀리서 보니 책등이 선명한 핑크로 보였다. 핑크는 어려서부터 나를 일깨워주는 색이었다. 할머니, 엄마, 그녀 그리고 딸기코 사장까지. 그 책을 한참 바라보다가 작별 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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