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명소를 소재로 한 (스마트소설)
비어있지만 가득한
주택가 골목에 있는 갤러리에서 선배 개인전이 열렸다. 제법 유명한데 왜 변두리 골목에 있는 갤러리에서 전시를 할까 의아했다. 그는 조각 전공이지만 가끔 그림도 그렸다. 제목은 언제나 ‘무제’였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해석이 필요 없는 추상적이고 텅 비어 있는 듯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첫 개인전 때 ‘zero'라는 작품을 감상하다가 그에게 알 수 없는 이미지만 포착하는 이유를 물었다.
“아무 내용도 느껴지지 않아야 격이 있는 비평이 나오는 거야.”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의 작품 ‘zero’를 다시 감상했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화면을 자세히 보니 지우고 벗겨내고 탈색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의도가 있을 것 아냐?”
“나는 무대만 제공하는 거야. 관객이 무대에 올라 스스로 느끼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거지.”
“난 형 작품 보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관객을 저 너머로 들어가는 문 앞까지. 딱 거기까지만.”
선배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고 사라졌다. 그의 흐릿한 이미지가 거듭 포개져 아른거렸다. 나는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기도 벅찼던 시기에 그는 그리는 행위를 넘어 어떻게 보여주는가를 고민했다. 그를 존경하게 되면서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모방했다.
선배의 개인전이 열리는 변두리 주택가 갤러리를 찾아가면서 전시공간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대학 시절 인사동 화랑을 돌아다닐 때마다 그곳에 내 작품이 걸려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미대를 졸업하고 몇 년 지나 자 인사동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상권이 살아나면서 화랑은 나가고 그 자리에 술집이 들어왔다. 미술계의 분위기도 바뀌었다. 작품성을 인정받는 젊은 작가들은 레지던시를 운영하는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기존 미술 개념을 벗어난 작품으로 타 장르와 융합을 시도하는 작가들은 성수동, 문래동의 복합예술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인사동 화랑에 관한 로망을 버리고 몇 년간 여러 문화재단의 신진작가 지원 공모에 매달렸지만 선정되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변두리 주택가 골목에 있는 갤러리는 아니지 싶었다.
새절역에서 내려 골목을 돌고 돌았다. 갤러리는 지나쳤던 좁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웅장한 아치형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고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자갈밭에는 얇은 철 파이프를 이어 붙여 만든 조각물이 오각형의 프레임 위로 설치되어 있었다. 조각물은 거미줄을 뭉쳐놓은 것 같은 형상이었는데 외계인과 교신하는 안테나 같았다. 오래된 미니 2층 주택을 개조한 갤러리는 지상과 2층에 전시실이 있었고 반지하 전시실은 건물 크기만큼이었다. 지상과 2층에는 서울문화재단 지원 공모에 선정된 신진작가의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꽤 유명한 작가들의 전시가 이어지는 갤러리였다. 기획전시장의 방명록을 보니 대단한 작가들의 사인이 넘쳐났다.
선배의 개인전은 반지하 전시실이었다. 반지하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 옆 자갈밭에는 ‘SPACE.55’라고 새겨진 금도금 사인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노란 빛이 찬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정사각형의 금도금 사인물 화면에 반사된 하얀 자갈밭, 그 자갈밭을 기어가는 듯한 작은 거북이 조각상이 보였다. 그리고 맞은편 담벼락에 세워진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여인상이 인상적이었다. 꿈을 찾아 자갈밭을 넘어가는 거북이의 안녕을 기원하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입구에 붙여놓은 현수막을 보니 개인전 제목은 ‘zero'였다. 계단을 내려가자 짙은 콘크리트 벽이 백열 조명을 받아 밤색 톤으로 변해 있을 뿐 벽에도 바닥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과연 비어있음을 말하는 ‘zero'가 맞았다. 아무것도 없는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콘크리트 벽의 거푸집 자국은 태고의 신비를 그린 유화 같았고 투명 우레탄을 칠한 바닥은 천지창조가 이루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 같았고 천장의 녹색 이끼 같은 자국들은 생명이 움트는 기운을 풍겼다. 벽에 일부러 칠을 했을까? 그건 모를 일이었다. 전시장을 돌아 나와 입구 쪽 반지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이했을 때 가슴속에서 희망이 끓어올랐다. 선배의 개념예술은 날로 발전하여 아무것도 없이 조명만으로 큰 감동을 주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예전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무대만 제공하는 거야. 관객이 무대에 올라 스스로 느끼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거지.”
전시장 구석구석을 카메라에 담고 마당으로 나오자 미술품 운송 트럭이 후진으로 갤러리 마당까지 들어왔다. 조수석에서 내린 사람은 선배였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나는 선배를 도와 작품을 내려고 갤러리 큐레이터와 작품 디스플레이를 했다. 선배의 작품은 그의 독특한 시선으로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으로 바꿔놓은 설치물이 대부분이었다. 일상에서 흔하게 얻을 수 있는 기계 부품, 고무 타이어, 나뭇가지 등이 그의 집요한 호기심과 사유를 바탕으로 전혀 다른 개념의 사물로 둔갑했다. 그가 이번에 ‘zero'를 내세우며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 작품을 감상하면서 당황스럽고 화가 났다. 내가 좀전에 감동한 작품 ‘zero'가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전은 내일 오픈이었다. 나는 날짜를 잘 못 보고 특별 손님이 되어 진짜 작품을 감상했던 것이다.
작품 디스플레이가 끝나자 큐레이터가 개인전 안내 인쇄물을 가지고 내려왔다. 큐레이터가 쓴 작품 소개 글에는 이번 ‘zero'는 사물을 대상화하기보다 사물과 하나가 되려는 시도라고 하면서 기존의 사물을 다른 개념의 둔갑시키고 비워내면서 궁극적인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말 알 수 없는 ‘zero'에 관한 사유였다.
우린 갤러리에서 제공한 맥주와 잔을 들고 마당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재즈풍의 연주곡이 흘러나오는 술집이 연상되었다. 나는 건배를 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작품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살짝 짜증 났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건 부러움이었어. 관객의 다양한 감정과 감각까지도 예술의 도구로 활용하는 능력에 대한 부러움.”
“너는 매사에 너무 진지한 게 탈이야.”
선배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면 오히려 부러움이 사라졌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이번 개인전은 엉뚱한 상황 자체를 작품으로 표현했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겨 버렸다. 그것은 어쩌면 내게 작품에 대해 진지하게 말한들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더 멋있고 부러웠다.
갤러리 마당에 있는 조각물을 비추는 조명 때문이었는지 유리잔의 맥주가 화사한 금빛으로 보였다. 나는 잔을 들어 황금빛 액체를 홀린 듯 쳐다보다가 말했다.
“나는 오늘 여기서 금광을 발견했어. 텅 비었지만, 금덩어리가 가득한 새로운 세계였어.”
선배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개인전 현수막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는 첫 개인전을 꼭 저 금광에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