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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Sep 06. 2020

다 식은 투메릭 진저

숨은 명소를 소재로 한 (스마트소설)


   다 식은 투메릭 진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그 간절함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어린 시절 동네 골목으로 간다. 그곳엔 오래된 주택을 개조하여 만든 카페가 있다. 카페의 대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녹색 철 대문은 녹이 슬거나 페인트를 덧칠한 세월의 흔적이 없다. 원래 뾰족한 장식이 달린 남색 대문은 너무 낡아 카페로 공사할 때 떼어내고 새 대문을 달았다. 녹색 대문은 빨간 타일로 치장한 대문 기둥과 잘 어울린다. 마당에 들어서면 고향 집에 온 기분이다. 중학교 때까지 마당이 있는 집에 살았다. 변두리지만 서울이었다. 경기도 고양시에 일산신도시가 생겼다. 형이 결혼하기 전에 부모님은 주택을 팔고 일산 신도시 아파트로 이사 갔다. 아파트를 사고 남은 돈으로 형의 전셋집을 마련했다. 내가 결혼하자 부모님의 아파트는 더 작아졌다. 서울 변두리 마당이 있는 집은 나의 꿈이었다. 꿈은 이루지 못할 것 같다. 30년이 넘은 작은 아파트에서 국민연금으로 겨우 살고 있다. 그래서 어렸을 적 동네 친구가 살았던 이 카페에 자주 간다. 몇 년 전 딸애를 결혼시키고 어렸을 적 살던 집을 찾아갔다. 뛰어다니며 공을 차던 골목이 이렇게 좁았었나? 집이 있던 자리엔 5층짜리 원룸이 들어서 있었다. 대추나무가 있던 자리가 원룸 건물의 출입구가 되었다. 나는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치매 환자처럼 원룸 앞을 서성거리다 왔다.  

  카페 대문을 들어서면 꾸미지 않은 작은 화단이 있다. 그곳의 나무는 밤색, 빨간색, 녹색, 노란색 실로 뜨개질해서 만든 원피스를 입고 있다. 멀리서 보면 나무가 오색비단 조각을 잇대어 만든 색동저고리를 입고 나를 맞는 것 같다. 오늘은 색동저고리를 입은 나무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서낭당의 나무 같다. 현관으로 향하는 몇 개의 계단을 오른다. 반지하가 있는 이층집이다. 이런 집을 미니 2층이라고 불렀다. 비가 온 다음 날 이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네 식구와 해가 질 때까지 지하에 고인 물을 퍼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첫 손님이었다. 내가 즐겨 앉는 자리는 팔각형 창가 자리다. 벽에 테이블이 붙어 있어 아늑하고 창밖을 바라보면 색동저고리를 입은 나무가 보여서 좋다. 가을 하늘이 티 없이 파래서 팔각형 창이 그림액자 같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박 여사가 즐겨 마신다는 ‘투메릭 진저’를 주문했다. 그녀는 이 카페에 자주 간다고 하면서 시를 읽기 좋은 카페라고 했다. 그녀가 이곳에서 생강, 감초, 강황, 레몬그라스, 오렌지껍질 블랜딩 허브티를 마시면서 시를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화장 하지 않아 잔주름이 그대로 드러난 얼굴이 더 곱다. 곱게 나이 들어 세월의 흔적이 아름다운 여자다. 

  자리에 앉아 붓펜 그리고 색지로 만든 손바닥만 한 카드 묶음을 꺼내자 옆 테이블에 앉은 30대 여자가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이 카페의 단골들은 대부분 혼자이고 노트북을 들고 무엇을 쓰러 온다. 그동안 마음 편안하게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손녀를 본 할아버지가 편안하게 창작행위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박 여사의 말을 듣고 찾아온 이곳은 추억이 있는 장소였다. 그곳이 차를 마시며 방해받지 않고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카페로 변신해 있었다. 손님들의 말소리를 잡아주는 다양한 연주곡이 끊이지 않고 은은하게 풍기는 갓 구운 빵 냄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집에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없다. 마누라 몰래 하기도 힘들고 가까이 사는 딸애가 맡긴 손녀가 날 가만히 두지 않는다. 유리 주전자에서 투메릭 진저 한 잔을 따랐다. 빛바랜 레몬빛깔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향을 음미했다. 루메릭 진저는 이 카페의 빈티지한 가구들과 아주 잘 어울린다. 주택의 구조를 그대로 살려 아기자기하게 변신한 카페의 매력은 창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시원스런 풍경이 아니라 담장 밑에 모여 있는 삶의 흔적이 묻은 잡동사니들이다. 그런데도 답답하지 않고 사물 하나하나가 설치미술의 오브제처럼 생각과 생각을 연결해 준다.

  보름에 한 번 모이는 시 창작모임에 열심히 나가고 있다. 박 여사 때문에 시가 점점 좋아진다. 지금 당장은 시를 쓸 수 없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여사가 감동할 만한 멋진 서정시 한편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쓴 시를 손 글씨 카드로 만들어 박 여사에게 선물할 것이다. 손글씨를 연습하려고 서점에서 시를 모은 필사 교본을 사서 연습해보았다. 좋은 글귀를 따라 쓰면서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문장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몇 번 쓰다 보니 남의 생각을 따라 쓰는 행위에 반발심이 생겨 내 습작 시를 붓펜으로 정성스럽게 쓰기 시작했다. 욕망이란 어휘를 쓸 때 일부러 이응을 크게 쓰거나 찌그러뜨려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어휘는 일부러 손을 떨며 써보기도 하면서 내 그림 글씨를 만들었다. 어느 정도 감정을 전달하는 그림 글씨를 손에 익힌 다음 종이와 펜을 바꿔보았다. 커피전문점의 냅킨을 사용해 보았고 수채화를 그리는 두꺼운 종이도 사용해 보면서 캘리그라피를 응용한 테라피를 생각해 보았다. 나만의 그림 글씨를 만들어가며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테라피. 이집트 상형문자 기록 행위를 연구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건과 사실을 기록하고 재생할 수 있는 교본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여러 이미지가 하나의 낱말을 암시하게 하고 주술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더 좋을 것이다. 내가 부린 주술로 박 여사를 사로잡을 것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종이는 수채화를 그리는 와트만지다. 와트만지를 잘라 카드를 만들어 노랑 바탕을 칠했다. 향긋한 레몬 향이 났다. 손글씨의 색은 아직 고르지 못했다. 

  붓펜과 카드를 가방에 집어넣고 시집을 꺼냈다. 다음 주 시 창작모임에서 공부할 중견 시인의 시집이다. 박 여사가 왜 이 시인을 좋아하는지 궁금하다. 문소리가 날 때마다 시집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출입구를 바라봤다. 이번에도 아니다. 출입구 계단에 깔린 빨간 카펫에 햇볕이 비스듬히 걸쳐있었다. 집에 가야할 시간이었다. 다 식은 투메릭 진저를 마시고 일어났다. 속이 쓰렸다. 생각해 보니 점심을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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