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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욱 Sep 06. 2020

고목은 언제나 나를 내려다본다

숨은 명소를 소재로 한 (스마트소설)


   고목은 언제나 나를 내려다본다


  빗소리가 세상 소음을 앗아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지렁이가 기어 나왔다. 생물이 돋아나고 기지개를 켰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창가 선반에 올려놓은 선인장을 발견했다. 매일 보지만 존재감이 없는 유일한 생명체였다. 따로 관리가 필요 없고 물만 가끔 아주 조금 줬다. 빗소리를 들으며 선인장을 살펴보니 기하학적 형태와 가시가 만들어낸 패턴이 볼수록 매력적이었다.

  선인장 같은 그녀는 섹스가 끝나면 항상 돈을 줬다. 처음 내 집에서 잤던 날 그녀는 서둘러 옷을 입고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베개에 올려놓았다. 돈을 본 순간 일어나서 같이 밥을 먹으러 갈까, 아니면 한 번 더 하자고 할까 고민하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술집에서 처음 만나 새벽까지 마시고 몸짓과 눈빛으로 섹스를 갈구한 끝에 어렵게 집에 같이 왔다. 그래서 더 그녀가 아침에 건넨 만원의 의미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 만 원을 손에 쥐고 땀을 흠뻑 쏟은 행위가 겨우 만 원밖에 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만 원은 그녀와 나 사이에 묘한 긴장감을 형성해 주었다. 성적 욕망에 애정이 싹트지 않게 해주었고 매번 관계가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녀가 깜박하면 만 원을 달라고 했다. 돈을 받아야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던 날엔 더욱 그랬다. 

  그녀와 멀어진 것은 회사 일 때문이었다. 어려워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전 직원이 공장에서 계속 야근했다. 사정은 나아지지 않아 집에 못 들어가는 날도 많았다. 일 때문에 약속을 몇 번 못 지키자 그녀는 알아들었다는 듯 더는 연락하지 않았다. 피로에 찌들었던 나는 그저 만 원 만큼의 상실감만 들었을 뿐이었다. 당시 그녀보다 더 신경 쓰였던 것은 입양 보낸 지미였다. 

  몇 년 전 애견센터에서 포메라니안 암컷 두 마리를 샀다. 가게 주인은 하나는 외로우니 두 마리를 권하면서 자매라고 했다. 서로 닮은 것 같지 않았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넋을 잃었다. 집에 데리고 온 아이들에게 지미와 진주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미는 듬직하고 나를 따랐지만 진주는 새침데기에다 지조 없이 아무나 좋아했다. 진주는 자라서 반항아가 되었다. 진주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입양 보내고 나자 지미가 외로워 보였다. 지미를 잘 보살피려고 마음먹었는데 회사가 어려워졌다. 서울 근교의 공장에서 야근하다 다음 날 집에 들어가는 날이 많아졌다. 그날은 그나마 일찍 들어간 날이었다. 지미가 침대 위에 똥을 여러 군데 싸 놓았다. 지미는 욕구불만과 서운함의 표시를 자신의 똥으로 표현한 것이다. 온종일 컴컴한 방에서 혼자 갇혀 지내는 지미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앞으로도 별 뾰족한 수가 없는 내 처지를 생각하니 안타깝고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민하다가 동물병원에 갔다. 원장은 입양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얼마를 부를 거냐고 물었다. 떠나보내는 것도 마음이 아픈데 돈을 어떻게 받느냐고 했다. 원장은 돈을 받아야 입양하는 사람이 지미를 더 소중하게 여긴다고 했다. 결국 고민하다 만원을 불렀다. 

  지미를 입양하는 날 노부부를 만나 지미를 건넨 곳이 은평 한옥마을 도시생물 다양성 습지였다. 내가 노부부에게 그곳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는 지미와 가끔 산책하러 갔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미와 나는 그곳에 있는 220년 묵은 고목 주위를 뛰어다니며 즐겁게 지냈다. 지미를 노부부에게 건네고 만원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220년 묵은 고목 뒤에 숨었다. 지미는 노부부의 품에 안겨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았다. 나는 만 원짜리 한 장을 손에 쥐고 220년 묵은 고목에 기대어 멀어져가는 지미를 보면서 울었다. 고목이 진동하듯 부르르 떨렸다.  

  오늘에야 알았다. 봄과 가을에 꽃도 피운다는 선인장이 말라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클수록 손이 덜 간다고 했는데 만 원짜리를 사서 그런가? 통통하고 가시가 많은 선인장은 햇빛이 적은 환경에도 잘 자란다고 했는데 그건 비쌌다. 나는 선인장에게 빗물을 주고 싶어 마당에 내어놓고 한참 바라보다 은평 한옥마을로 달려갔다. 빗속을 달렸다. 빗방울이 눈물을 씻어주고 어깨를 어루만졌다. 한 십여 분을 전력 질주하는 동안 빗줄기가 굵어졌다. 한옥마을 기왓장을 타고 내린 물줄기가 갈증 난 하수도로 빨려 들어갔다. 빗방울의 맛을 봤다. 흙의 내음 풀의 떫음이 감돌았다. 

  은평 한옥마을엔 도시생물 다양성 습지가 있다. 그곳엔 나의 연인과 이별하는 장면을 지켜본 220년 묵은 고목이 있다. 고목은 습지의 물을 먹고 그늘을 제공하는 것 같았다. 연인들은 습지 산책로 데크 입구를 지키는 고목 옆에서 사진을 찍고 젊은 부부는 아이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언제나 말없이 나를 반겨주는 고목을 안았다. 고목의 둘레는 3m 가까이 되었다. 나의 두 팔로는 고목의 절반밖에 안지 못했다. 고목을 안은 것이 아니라 고목에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고목은 자라지 않고 늙어가고 있었다. 껍질이 살비듬처럼 일어난 고목의 기둥은 코끼리 다리 같았다. 무릎관절처럼 휘어진 부위는 이끼와 주름이 가득했다. 기둥에서 양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 사이에 철심으로 연결한 와이어가 박혀 있었다. 무거운 가지가 휘어져 부러질지 몰라 서로 지탱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고목은 나뭇잎에 빗방울을 한껏 머금었다가 나에게 떨어뜨렸다. 빗물에 내 속까지 흠뻑 젖었다. 오직 나와 고목을 위해 내리는 비 같았다. 나는 고목을 안고 빗물로 눈물을 가렸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산책 나왔다 길을 잃었을지도 모를 지미를 찾아 습지를 계속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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