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주욱 Oct 10. 2020

키키의 체온

화가 서정배 인물스마트소설

<키키의 체온-화가 서정배 인물스마트소설>


   아침 햇살이 흐릿하게 스며든 캔버스가 울렁이며 푸른빛을 반사했다. 그림의 배경은 조명이 꺼진 연극무대 같았다. 진청색 커튼 하나만 드리운 무대는 단조롭지만 청색과 검정으로 이어지는 색이 겹겹이 칠해져 무대의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무대 한가운데 누워있던 키키가 일어났다. 키키는 밝음이 눈에 익기를 기다렸다. 햇살이 부드럽게 키키의 온몸을 감싸 안자 그림의 무대에 조명이 들어온 것 같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키키의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하얬다. 키키를 창조한 그녀는 키키에게 어떤 옷을 입힐까 고민 중이다.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작품을 붙잡는 바람에 키키는 계속 변신 중이다. 키키는 봉긋한 가슴도 없고 잘록한 허리도 아니다. 다만 긴 머리카락과 생김새가 그녀를 닮아 키키도 여자라고 추측할 뿐이다. 키키는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도구로 창조한 캐릭터다. 

  밝음이 눈에 익은 키키는 조심스럽게 발을 뻗어 캔버스를 빠져나와 바닥을 디디고 섰다. 태어나서 바깥세상으로 첫 외출이었다. 맞은편 방 그녀의 침실에서 발소리가 무겁게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깜짝 놀라 캔버스 뒤에 숨었던 키키는 고개를 내밀고 그림 속에서 바라봤던 팔레트에 가득한 검은 담즙을 손가락으로 찍어 보았다. 유동하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검은 담즙은 끈적끈적했다. 검은 담즙은 그녀가 그림을 그리면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에 빠질 때 생성되는 감정을 숙성 시켜 만들었다. 여러 가지의 감정 중에 우울함이 주성분이었다. 그녀는 검은 담즙에 물감을 섞어 키키를 창조했다. 

  키키는 그녀의 작업실과 자신의 무대인 짙푸른 정적이 흐르는 그림 속이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그림이 완성되어 누군가에게 넘어간다면 이런 평온한 시간은 사라질 것 같아 키키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맞은편 방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키키는 작업실을 빠져나가 그녀의 침실로 숨어들었다. 

  키키는 뜨겁던 겨울 아침에 떠난 멜랑꼴리를 떠올렸다. 그녀의 우울한 감정이 숙성되어 검은 담즙이 되고 검은 담즙이 딱딱하게 굳으면 멜랑꼴리가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멜랑꼴리는 농도에 따라 화병의 꽃처럼 며칠간 머물기도 했고 반려동물처럼 오랜 시간 머물기도 했다. 어떤 멜랑꼴리는 고양이처럼 집을 나갔다가 집을 찾아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의식의 흐름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오랫동안 맴돌던 멜랑꼴리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갈등을 빚었다. 그녀가 오랜 습작을 통해 느낌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터득하자 멜랑꼴리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싫었다. 멜랑꼴리는 키키를 통해 자신이 구체화 되는 것을 보다가 말했다. 

  “나를 활활 태울수록 작품은 좋아지지만 나는 금방 재가 될 거야.” 

  그녀에게 있어 연인 같던 멜랑꼴리가 떠난 겨울 아침은 키키의 얼굴보다 환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녀는 겨울을 보내는 동안 계속 소화불량이었다. 그녀는 봄 햇살 환한 아침에 일어나 침대 시트의 네 귀퉁이를 벗겼다. 멜랑꼴리와 같이 사용했던 침대 시트로 멜랑꼴리의 체취가 묻은 물건을 싸서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멜랑꼴리의 물건을 전부 침대 위에 올렸다. 침대 시트로 멜랑꼴리의 물건을 싸기 전에 멜랑꼴리의 물건을 한참 바라봤다. 함부로 엉켜있는 멜랑꼴리의 물건들을 다시 차곡차곡 정리했다. 멜랑꼴리는 많은 흔적과 물건을 남기고 떠났다. 멜랑꼴리가 벽에 그린 낙서를 따라가다 발견한 티셔츠는 옷장과 벽 사이에 끼어 있었다. 찌그러진 모자, 외출할 때도 입고 잠잘 때도 입었던 멜랑꼴리의 운동복은 옷장 깊숙이 박혀 있었다. 소파에 누워 멜랑꼴리와 티브이를 볼 때 사용하던 쿠션도 침대에 올렸다. 온 집 안을 뒤졌다. 멜랑꼴리의 물건이 침대 가득했다. 그녀는 침대 시트의 네 귀퉁이가 서로 크로스가 되도록 묶었다. 

  연인 같던 멜랑꼴리가 떠난 날은 뜨거웠다. 바짝 마른 겨울 낮을 태웠다. 겨울 낮은 빨리 탔다. 타오른 낮은 새까만 숯이 되었다. 그날 밤엔 숯이 된 낮을 태웠다. 그녀의 새카만 가슴이 벌겋게 타올랐다. 그녀는 아침이 돼서야 재가 된 가슴을 안고 침대에 쓰러졌다. 

  침대 시트로 싼 묵직한 보따리는 멜랑꼴리의 물건을 포근히 안고 있었다. 그녀는 보따리를 안고 밖으로 나갔다. 키키는 그녀의 그림자를 밟지 않게 조심하며 따라갔다. 그녀는 아파트 의류 수거함 앞으로 다가갔다. 보따리를 들어 올리는 순간 보따리에서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그녀는 도저히 보따리를 시커먼 구멍으로 밀어 넣을 수 없었다. 보따리를 안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은 모두 걷거나 뛰고 있었다. 모두 갈 곳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보따리를 안고 무작정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보따리를 깔고 앉아서 쉬었다. 보따리는 안락의자 같았다. 

  봄이 왔지만 바람은 여전히 찼다. 어느새 그녀는 보따리를 안지 않고 한쪽 손으로 들고 걷고 있었다. 보따리를 잡은 손이 시려 보따리를 다른 손으로 바꿔 들었다. 멜랑꼴리는 그녀와 밖에 나가면 항상 그녀에게 손을 잡아 달라고 졸랐다. 그녀는 보따리의 매듭이 멜랑꼴리의 손이라고 생각하고 걸었다. 걷는 동안 보따리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녀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와 의류 수거함 앞으로 갔다. 날이 저물어 아파트 창문이 노랗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는 집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누런 불빛이 태양처럼 환해져서 멜랑꼴리가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져 한참 불빛을 바라보았다. 멜랑꼴리의 불빛이 아니었다. 옆집의 불빛이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멜랑꼴리가 없는데 집의 창이 빛 날 리 없었다. 

  그녀는 다시 보따리를 안고 의류 수거함 앞에 섰다. 천천히 보따리를 들어 시커먼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보따리는 잘 들어가지 않았다. 보따리를 뽑아서 내려놓고 매듭을 풀기로 했다. 온종일 들고 다닌 보따리의 단단한 매듭은 풀리지 않았다. 손끝에 힘이 없어 매듭을 이로 물어뜯듯이 풀었다. 하나의 매듭은 수월하게 풀렸지만 또 하나의 매듭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나의 매듭은 멜랑꼴리와의 만남처럼 쉽게 풀렸고 또 하나의 매듭은 이별처럼 힘겨웠다.

  땅에 침대 시트를 펼쳐놓고 멜랑꼴리의 물건을 하나씩 시커먼 구멍으로 빠뜨렸다. 의류 수거함은 텅 비어 있었다. 쿠션이 바닥에 떨어지자 의류 수거함이 울렸다. 단추가 철판을 쓸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가슴은 더 답답해졌다. 빈손으로 아파트 현관으로 걸어가는데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하얀 꽃잎이 날렸다. 그녀는 내년 봄이 오기 전에 이번엔 온기가 없는 싸늘한 멜랑꼴리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조금씩 온기를 주면서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차가웠다. 이불을 올려 덮고 몸을 웅크렸다. 눈을 감았는데 묵직한 것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뜨거운 덩어리였다. 가슴은 뜨거운데 온몸이 바르르 떨리고 이가 서로 맞부딪쳤다. 키키는 그녀가 안쓰러워 이불을 살짝 들치고 들어가 그녀를 뒤에서 안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화가 서정배 인터뷰 함축>

“작품에 등장하는 ‘키키’는 사소하며 특별하지 않은 나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캐릭터이다. 감정을 그리며 감정의 역사를 쓰고 싶었다. 내 작품을 보면 사람은 무수한 감정을 느끼고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슬픔과 우울이다. 어쩌면 슬픔과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그림을 그리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야기하는 슬픔은 드라마틱한 감정이 아니다. 일상에서 이상하게 느끼는 우울한 기분이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다가오는 우울함이다. 우리의 감정이 우울하게 발화하는 것은 계기,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다. 잠자고 있던 엣 경험이 부지부식 간에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깔려 있는 원인 같은 요소를 화면에 표현하지는 않는다. 감정이 올라온 상태를 그리는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다가왔다 사리지는 감정의 흐름을 ‘키키’를 통해 표현한다.” 


<화가 서정배 소개>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든 ‘감정’을 느끼며 살아간다. 행복이나 기쁨의 감정도 느끼지만, 대부분은 ‘담담한’ 감정 속에서 일상을 산다. 그리고, 그 담담한 감정 속에는 때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울, 멜랑꼴리, 외로움과 같은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이와 같은 감정에 더 주목하는 것은 우주의 원리에서 보면 ‘먼지’같은 ‘내’가 매순간 삶을 살아내며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각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누군가가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감정’에 관심이 있다.

건국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조형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졸업한 후. 2000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1대학(Panthéon-Sorbonne) 조형예술학과(Arts Plastiques)에서 석사, DEA와 박사를 졸업하였다. 2019년 경기도 광주의 영은미술관에서 개인전이 있기까지 서울, 청주, 대전, 일본, 미국(LA), 파리에서 다수의 단체전과 11회 개인전을 열었으며 비엔날레,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 하였다.


<화가 서정배 대표작품>


작가의 이전글 유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