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 잠들기 전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사실 육아하는 보호자 입장에서는 아이의 일정한 루틴이란 게 더할 나위 없이 편하고 좋다. 특히 생후 1개월 남짓부터는 오후 6시쯤 씻기고 먹이고 트림시키고 난 후자장가를 부르면 오후 7시께 잠이 들었다. 그럼 밤새 한 번도 안 깨고 자는 아이가 대견했고, 아침 7시께 일어났다며 옆에서 꼬물거리는 것도 신기했다.
태교 기간 [베이비 위스퍼] 책에서 읽은 대로생후 10일 무렵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하는 규칙적인 패턴은 정말이지 큰 도움이 되었다.덕분에 밤잠 설치며 아이를 재우느라 고생한 기억은 별로 없다.
그렇게 규칙적인 활동으로 자란 아이가 16개월 되는 무렵이었다. 밤늦도록 평창 동계올림픽 중계를 보느라 넋이 나가 있는 엄마 아빠에게 매우 졸린 얼굴로 잉잉거리며 자신의 치약 칫솔을 가져와 내민 적이 있었다. 빨리 양치시켜주고 재워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때야 비로소 녀석의 행동을 이해했던 나는 잠자기 위한 루틴이 아이에게 준 긍정적인 효과를 느꼈던 바다.
잠을 잘 시간이 되면 양치를 하고, 모든 불을 끄고 침대 위 스탠드 불빛 아래서 동화책을 몇 권이고 읽어주고, 누워 자장가를 불러주고, 한국어와 프랑스어와 영어로 잘 자라는 인사와 여러 표현을 몇 마디씩 해 주고, 뽀뽀하면 아이는 금세 잠에 들었다. 그렇게 몇 번 뒤척임도 없이 잠든 아이를 볼 때마다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그런데 작년 9월 창업 이후로 엄마가 너무나 바빴던 나머지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잠에 드는 날들이 늘어났다. 때문에 프랑스어와 영어 표현 따라 하기가 '옛날이야기'로 대체되었나 보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와 함께 잠들기 전 아이는 옛날이야기도 해 달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옛날 옛날에 말이야......."
불을 끄고 누웠더라지만 아이의 호기심 반짝이는 분위기가 느껴져 최대한 재미있게 말을 이어갔다. 엄마가 늦게 들어오는 날엔 할머니와 잠들고 엄마가 일찍 오는 날엔 엄마랑 잠들기를 병행하는 아이에게는 외할머니 스타일이 추가된 잠들기 루틴이 꽤나 만족스러웠나 보다.
"자, 이제 옛날이야기해 줘"
책을 다 읽고 나면 아이는 말했다. 마치 엄마가 이 정도 노력 봉사까지는 해야 그 자신이 빨리 잠에 들 것이고, 그래야만 엄마는 육퇴가 가능하며 비로소 해방을 얻으리라...라는 영리한 계산마저 느껴지는 저 당당한 외침.
옛날이야기, 아이가 일찍 잠에만 든다면, 엄마를 자유롭게만 둔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 종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여러 현장 감리에, 실측, 상담, 계약 진행, 설계, 견적서를 쓰면서 발주까지 다 하느라 하루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는 엄마의 일상이란 말이다. 너무나 고된 하루를 보내는 나머지 엄마는 침대에 눕는 순간 의지와는 상관없이 스르르 눈이 감겨곯아떨어진다는현실이다.
"엄마, 옛날이야기해 줘"
"응......."
"엄마?"
"으응?"
"엄마 자?"
"아니 옛날이야기 생각 중이야......."
"엄마아~~ 엄마 자?"
"아직도 생각 중이야~~"
하지만 곧이어 울려 퍼지는 드르렁드르렁 소리에 아이는 엄마 코에 손을 대어보고는 체념하곤 드러누워 잠이 든다.
그렇게 아이의 행동을 어렴풋이 느끼며 완전히 곯아떨어지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엄마! 왜 어젯밤에 옛날이야기 안 하고 잤어?"
라며잠에서 깬 아이가 볼멘소리로 물을 때면 미안하다말하고, 오늘 밤에는 꼭 이야기를 해 주겠다 말해줬다.
하지만 이겨낼 수 없는 쏟아지는 잠도 그러하거니와 아이에게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 압박(!)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최선을 다해 이야기를 풀어냈지만,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소재가 고갈되는 상황이 왔다.
그래서 시작되었다.
"옛날에 말이야, 한 소녀가 살았는데 책 읽기를 좋아했대. 온 동네 책을 다 읽고, 학급문고 책을 다 읽고도 모자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었대. 그 소녀가 누군지 알아?"
"몰라. 누군데?"
"그 소녀는 바로 엄마야! (으흐흐흐~)"
그러자 아이도 까르르 웃었다. 그렇게 잠든 밤이 지나고 또 며칠 지난밤이었다.
다시 옛날이야기 압박이 시작되었다.
"옛날에 하늘에 사는 선녀님들이 땅에 내려와서.......선녀가 뭔지 알아?"
"엄마, 그거 혹시 선녀가 옷을 뺏겨서 하늘에 못 올라갔다는 이야기 아냐?"
"응? 어떻게 알았어?"
"유치원에서 배웠어"
요즘 아이는 아는 것이 제법 많아졌다. 그렇잖아도 소재 고갈로 고통받고 있는데 이야기감 하나가 줄어들었다. 온몸을 강타하는 피로를 무릅쓰고 워킹맘은 다시 힘을 낸다.
"옛날 옛날에 나무꾼이 도끼 하나를..."
"엄마 그거 금도끼 은도끼 아냐?"
"으응? 이것도 알아?"
"응. 할머니한테서 들었어"
집요하리만치 옛날이야기를 요구하는 아이의 압박에 워킹맘은 다시 힘을 낸다.
"옛날에 한 소녀가 살았는데..."
"엄마, 그거 또 엄마 얘기 아냐?"
"으응? 아니야. 잘 들어봐"
"한 여자가 비행기를 탔는데 그 옆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건 거야. 파리에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둘은 이야기를 나눴대. 그렇게 둘은 연애를 했고,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래서 그게 나야?"
라고 묻는 아이는 금세 심드렁해진다. 이미 다 아는 얘기고, 어차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걸까?
요즘은 많은 현장일에 밤샘이 일상이고, 녀석 얼굴 보기도 힘들 정도지만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가 되면 아들 얼굴이 떠오르며 얼른 유치원에 가서 얼굴 한 번 보고 올까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게, 편하게 카페나 하지 왜 힘든 인테리어를 시작해 가지고 그렇게 고생을 해? 엄마, 우리 그냥 카페 할까?"
를 묻는 저 천진한 눈빛과 표정에선 엄마의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가 다 녹아내린다. 어느새 아이는 마법처럼 엄마에게 새로운 에너지를 채워주는 내 삶의 원동력이 되었다.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알게 된 것 하나.
그것은 자식이 커 가는 것을 바라보며 기쁨을 느끼는 것이었다는 것을, 자라는 것을 보면서 세상 모든 뿌듯함을 느끼는 것임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바쁜 와중에도 하루 종일 별일 없이 친구들과 잘 놀고 있을까를 걱정하는 워킹맘이지만, 어쨌든 이야기를 좋아하며 잠자기 루틴을 즐기는 아이의 밤낮은 고단한 일상에 더해지는 고행이다. ㅠㅠ
그럼에도 오늘 밤엔 꼭 녀석을 안아주고 애정 가득 담긴 뽀뽀를 하며 함께 곤한 잠에 들기를 바라며, 또 어떻게 하면 녀석을 기쁘게 만들어줘야 할까를 고민하는 워킹맘의 세헤라자드 천일야화는 계속된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