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뇌하고 있는 이 땅의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들을 위해 고백하듯 남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 볼까 한다.
무식하고 용감했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으면 급여가 나오는 삶을 살아왔던 사람이 애를 키우다 무작정 기술을 배우겠다며 용감하게 시작했다. 그것은 그 의자를 떠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무직에 대한 회의였다. 변변한 경력기술서 & 포트폴리오 하나 남지 않는 사무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커져 갔다. 창의적이었지만 역시나 방어적인 업무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공격적이며 전사적인 업무 스타일이 부족했다. 게다가 뭐 이렇게 한다고 하여 인생이 한 번에 확 바뀌는 것도 아닌데 (의사, 변호사 같은 국가면허도 아닌데 말이야) 뭘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나... 하는 현실과의 괴리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슬럼프가 왔다.
그러던 어느 저녁이었다. '엄마 나 좀 보세요~' 하면서놀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내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콩글리시'를 하며 활짝 웃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엄마 아빠가 합쳐 5개 국어를 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어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영어 표현을 배워왔을까나... 안타까움에 앞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웃을 수 없었다.그리고 그 순간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났다. '아, 나는 지금 내 꿈만 좇아내 생각만 하며 살고 있구나. 아이가 자라나는 환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이제 40개월이 되는 아이, 한국 나이로 네 살이고 곧 다섯 살이 될 텐데 아이가 살아갈 조건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살았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성인이 되어 봉쥬르~ 말 한마디 못한 채 처음 프랑스에 갔다. 그리고 파리에서 아베쎄데(abcd)부터 배우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노력을 많이 하여 끝까지 & 깊숙이 들어가야 뒤늦게 겨우 깨우치는 머리라 복잡한 문법을 이해하기 위해 샤워하며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렇게 터득한 문법이 통째로 머릿속에 들어가 자유롭게 활용되기 시작하니 어느 순간 열려져 있던 귀에 날개를 달고, 입이 열리고 작문이 완성되기 시작했다.
한 번 득음의 경지에 오른 이는 그 세계에서는 도가 튼 법이다. 나도 그와 같은 과정을 겪고 나니 나만의 쉬운 불문법 체계가 잡혔다. 하나의 외국어를 추가하면서 더 많은 자유를 얻었지만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나는 나중에 내 아이는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배우기 위해 이렇게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영어를 배우기 위해 초, 중, 고교 의무교육을 통째로 들이고도 모자라 (요즘엔 유치원부터) 토익, 토플에 매달리며 취업대비로 대학생활을 보내야 하는 그런 고단한 삶을 내 아이가 반복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나은 길을 좀 더 나은 방법으로, 내가 겪어온 모든 시행착오를 최대한 아이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세상 모든 부모들의 바람처럼 말이다.
뉴욕 UN 본부에서 근무하는외국인 친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한국이 내는 UN분담금은 상위 15개국 안에 들지만 정작 근무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아. 이유는 기본적인 어학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국인 지원자들이 많이 없기 때문이야. UN에 어느 국적의 직원들이 가장 많은 줄 알아? 뜻밖에도 바로 필리피노야. 필리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영어로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고, 또 정말 성실하게 일을 잘하기로 유명하거든. 국가별 분담금 순위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채용비율이지"
이 좁은 나라에서 똑똑한 인재들이 언어 한계로 인해 많은 것들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물론 외국어 교육에 앞서 모국어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20대 초반 프랑스어를 배울 때 모르는 프랑스어 단어를 불한사전으로 찾아놓고도 그 한국어 단어를 이해 못해 나에게 '이게 무슨 뜻이에요?'라고 물었던 내 또래 어느 한국아이가 있었다. 그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고급 어휘도 아니었다. 그저 어려서 책을 읽지 않은 사람 같았다. 탄탄하게 자리 잡힌 모국어가 외국어 어휘력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여러 계기로 확고해졌다.
예전 직장에서 근무할 때 인턴들을 받아보면 더 그러했다. 외국에서 태어나 초, 중, 고 전부 현지에서 국제학교를 나왔고 대학은 특례입학으로 국내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영어, 불어는 물론이고 한국어를 꽤 유창하게 하여 많은 노력을 했겠구나 생각했다. 일부러 여러 일을 시켜보던 중에 그 친구가 제출한 한국어 보고서를 받고 나의 상사는 뒷목을 잡았다. 문장 자체가 초등학생의 작문실력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어 말하기는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재외동포 2세들을 여럿 보았다.
여러 계기로 나는 내 아이가 모국어부터 제대로 말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3-4개 국어를 자유롭게 말하는 외국인 친구들을 보면 그들의 성장환경이 언어를 자유롭게 했다는 확신은 더 커졌다. 그만큼 모국어 교육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 아이가 한국어 작문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영유아기를 친정에서 자연주의 방식으로 육아하는 것은 여러모로 시기적절하다 생각했다. 아이는 생후 15개월이 되어서야 겨우 첫발을 떼며 늦은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말은 월령에 비해 매우 빨랐다. 아이 얼굴을 보고 '어머, 어린 아기구나!' 하던 사람들은 아이가 입을 열어 말을 하기 시작하면 모두들 깜짝 놀라워했다. 표현력도 어휘력도 또래에 비해 빠르게 발달했다. 하지만 이제 유아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때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하고 있는 활동과 함께 아이를 위한 환경도 생각하면서 아이가 다섯 돌이 되면 데리고 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외국어 교육환경이 가능한 곳을 생각했다. 프랑스에는 이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지만,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예전보다 극우화 되고 있었고, 여행으로는 좋지만 아이를 데리고 정착해 살기에는 더 이상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을 바꿔보니 영어를 하면서 프랑스어도 쓰는 캐나다가 떠올랐다. 캐나다 퀘벡지역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니 아이 언어교육을 위한 환경으로도 적합하고, 또 프랑스어가 편한 나에겐 친구 사귀기는 물론이고 초기 정착도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지금 이렇게 배우고 있는 실내디자인 과정을 선택하고 자격증을 따는 것에 도전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술이든 배워두면 분명 어디고 쓸 수 있을 것이니 직업의 자유가 현실적으로 국경과 대륙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때부터 퀘벡지역으로의 유학, 이민 등에 대해 다방면으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민 에이전시를 만나 상담도 받아 보았다. 그런데 에이전시 대표는 나의 해외 경험과스펙이라면 직접 진행을 하는 게 좋겠다며 자신이 해 줄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뭔가 절박하게 여기를 찾아와 이민을 가려한다고 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소위 어깨에 들어간 '뽕'이 빠져야 하는데 그걸 빼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오히려 암행감사라도 나온듯한 태도였을 것이니. 그것은 고액 이민 수수료를 절박함으로 고분고분 낼 사람같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악담같이 들리지 않아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내가 그걸 직접 진행하고 처리할 능력이 되는데 왜 거액의 수수료를 내고 가야 하는지 난 분명 따지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필요이상의 정보까지 모두 얻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돌아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온 에이전시 대표는 "프랑스어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퀘벡지역으로의 이민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잘 가시라 인사했다. 고마웠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조급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여러 교민 사이트도 들어가 분위기도 살피고, 정보를 찾아봤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해외생활을 약 20여 년을 했다.낯선 곳에 가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한마디로 도가 튼 사람이 바로 나였다. 아는 만큼 보이더라고 현지 상황이 조금씩 파악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