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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Jan 30. 2020

엄마 회사에 왜 안 가요?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하여 [3]



1. 사무직의 배신

2. 직업의 자유 국경과 대륙을 넘다

3. 엄마 회사에 왜 안 가요?




어린아이 눈에도 엄마의 일상이 달라진 것이 신경 쓰였나 보다. 엄마가 왜 집에만 있냐는 물음에 '엄마가 너와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게 더 좋지 않아?'라고 말하자 아이는 '좋아. 그런데 엄마 회사는 왜 안 가요?'라고 되물었다. 출근하지 않는 엄마를 보며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엄마 심리상태가 아이에게 전달었던 것일까?


나이 마흔 하나에 마주한 막막한 미래였다.

막상 큰소리를 치고 시작은 했으나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이겨내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었다. 하루는 가만히 앉 도대체 내가 왜 불안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하나 차근차근 잘해가고 있는데 왜??? 어쩌면 생물학적인 나이도 원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들었다. 조기 갱년기가 시작될 수 있는 40대라는 심리적인 무게는 '불혹'이 안정감으로 느껴지기보다는 극복해야 할 숫자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혈기왕성한 심리상태였지만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록 외모는 주름이 생기고 흰머리가 있는 년이어도 마음은 이팔청춘에 머물러 있다는 그 말이 실감이 났다. 나는 뭐든 잘 해낼 수 있 의기양양했는데, 가만히 현실을 뜯어보니 30대 초반 미혼여성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두 번째 운명의 순간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물음을 던졌다.




[운명처럼 주어진 상황들을 즐겨라] 30대 초반 어느 날, 한 후배와 이야기하다 우연히 떠올리고 입 밖으로 꺼내 올린 이 문장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더랬다. 이렇게 멋진 문장을 만들어 냈더라니 흡족해하며 메모를 해 두었던 것이 자연스럽게 좌우명이 되었다. 그랬듯 지금껏 이어진 내 삶은 물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러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말이지 평범하지 않은 운명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좀 피곤했을 뿐. 덕분에 나는 탄력성이 좋은 사람으로 거듭났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됐다.


웬만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고 위기상황에서 냉철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에서 "어머 머머 어떻게 해~"는 그저 여성성을 유지하기 위한 추임새일 뿐이었다. 자기 연민이 과도여 때때로 자기 동정 (Self-pity)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이 과도한 자기 연민 덕분에 툭툭 털고 일어나는 탄성(elasticity)은 장점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생채기가 남아 영혼은 인성(toughness)의 상태요, 정신력은 연성(dutcile)로 남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선택을 하라고 하면 그것은 그때 그 상황 속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답했다. 현재 주어진 이 운명을 후회 없이 즐기는 것이 나에겐 최선이었다. 나이라는 무게는 잊고, 예전보다 많이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이가 주는 기쁨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 생각했다. 게다가 아이가 있는 덕분에 른 대안도 생각해 낼 수 있었다니 이만한 삶의 무게에 감사했다. 나는 다시 긍정적인 에너지로 채워지기 시작했. 




Plan A or Plan B, 투 트랙(Two track) 전략으로 선택의 여지를 남겨두기

실내디자인 공부를 계속하며 필요한 자격증을 딸 때까 캐나다 이민을 적극적으로 해 보자는 투트랙 전략으로 복잡한 생각을 다시 정리했다. 자격을 전부 취득하고 나중에 사업을 하는 중이더라도 건이 갖추어졌을 때 이민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렇게 틈만 나면 정보수집에 한창인 그즈음이었다. 아이의 교육을 위한 안정적인 캐나다 이민을 위해서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캐나다 연방정부 이민 점수표(CRS) 기준에 맞춰 크레디트로 환산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이점을 다 더해도 결국 캐나다 고용주의 레터 한 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 나서겠다며 새로운 시작을 외쳤더라지만 돌아온 곳다시 피고용인이 되어야 한다는 현실,  숨 막도돌이표였다. 내 떨치고 일어나 단순하게 접근했다. '그럼 그 레터를 준비하면 되겠네. 누구든 고용주가 될 사람을 찾으면 되잖아'라고 말이다. 동시에 하고 싶은 실내디자인 공부를 캐나다에서 계속하는 유학도 함께 고려했다. 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아이는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를 다니면 될 것이었다.

 

느 연구자료에서는 플랜 b는 플랜 a의 실패를 앞당긴다고 했다. 차라리 플랜 a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이 성공할 확률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선택의 여지를 두는 것, 그것은 나의 영역이고, 그 이후는 나의 의지를 떠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지만 두 배를 더 노력해서라도 보다 멋진 운명을 들어 내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상황은 북극에 떠 있는 빙하처럼 움직이는 것이었고, 나는 내 모든 노력을 다해 그 거대한 얼음조각을 하나 밟고 건너뛰어야 했다. 끝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엇인가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다.




지역을 일찌감치 정해두었던 덕분에 구역은 좁혀졌다. 거시적 차원에서 퀘벡 주정부 사이트부터 살펴보았다. 주정부에서 운영하는 구인게시판이 있어 최근 3개월 내 구인 게시물을 전부 읽고, 각 구인 공고마다 구글 지도로 주소를 검색해 가며 각 지역 내 주요 도시와 대략의 산업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조금씩 퀘벡 도가 머릿속에 그려지며 구별되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유년시절 동경했던 '빨간 머리 앤'처럼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목가적인 풍경 속 평화로운 삶을 상상했다. 그런 곳에서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여유롭게 육아하기를 원했다. 어쩌면 내 오랜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인 '슬리퍼 신고 집 앞 카페로 출근하여  커피 만드는 일'을 하게 될지로 모른다는 설렘도 일었다. 그렇게 살고 싶은 도시들이 몇 개 추려졌을 즈음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캐나다 유학 후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이민 시스템인 PEQ에 관 주정부 전면 중단이 발표되었다. (반발에 따라 2주 후 주정부는 전면 중단을 철회함) 이에 따라 퀘벡주 교민 커뮤니티는 아수라장이었다. 현지에 있는 한국 변호사 사무실에 대한 원망, 이민법무사들에 관한 불만, 이민 중개인들, 에이전시, 유학원 등에 책임소재를 묻는 것으로 한마디로 난리가 났다. 그들 말을 듣고 소위 집 팔고 차 팔아 왔는데, 불어도 못하는데 (영주권 신청 시 필요 불어 등급을 강화하고, 배우자에게도 불어 시험을 조건으로 규정을 바꿈) 이제 어쩌냐는 원망이 이어졌다. 아직 한 도 담가보지 못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프랑스어가 편하다는 이유로 캐나다 퀘벡으로의 이민 만만하게 생각했 나뜨끔하기까지 했다.


3개월여 준비한 실내건축제도 실기시험은 3주 앞으로 다가왔다. 늦게 깨우치다 보니 남들보다 배 이상 시간과 노력을 들여 내 능력 이상으과분하게 끌어올려둔 터였다. 덕분에 실력이 어떻든 시험에 대한 불안감은 되려 자신감으로 채워진 상태였다. 시험을 앞두고 오히려 여유가 생겼다. 원에 가는 횟수를 줄였고, 집에서 제도판을 붙들고 있는 시간보다 캐나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무엇인가 딱 하고 풀리는 그 맛이 없었다. 뭐랄까 일이 될 때를 가만히 보면  성공을 만들어 내는'기' 즉, '승기'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한 번 그 기운이 느껴지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그런데 아무리 방법을 고민해 보아도 이 상태로는 뾰족한 해결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 지난 메일함을 검색여, 몇 년 전 메일을 찾아냈다.  




P는 이전 직장에서 근무할 때 알게 캐나다인이었다. 몬트리올 내 중견기업의 부사장이었으며, 개인 컨설팅 회사를 별도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었다. 이런데도 연락을 해도 되나, 한다면 뭐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많은 생각이 지났다.  아이는 옆에서 새근새근 자고 있었고,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몬트리올은 낮시간이었다. '일단 한 번 물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짧은 메일을 썼다.    


간단한 안부를 묻고, ' 아이 교육 때문에 퀘벡으로 이민 가고 싶은데 일자리(노골적으로는 고용주의 확인서였지만)가 필요해. 혹시 나 같은 경력자 필요하지 않아?' 아니면 말고 라고 간단히 적었다.


참 내가 적어놓고도 뻔뻔하다 싶어 부끄러움에 메일을 보내 놓고 에라 모르겠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곤하게 자고 있는 아이 얼굴 한 번 들여다 보고 잠시 뒤척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메일 알림 진동이 울기 시작했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하여 [4] 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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