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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Dec 28. 2019

실내건축기능사 시험에 합격했다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던 길을 위해!


[프롤로그]

3년여 육아를 하는 동안 나는 도태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 모든 건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무엇인가 계기가 필요했다. 짧은 시간 집중하여 성취를 느껴볼 수 있는 일에 먼저 도전하여 나(아직 죽지 않았음을)의 존재감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보니 내가 그동안 정말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일을 꼭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는 설렘에 심장이 뛰었다. 중고교 시절부터 꼭 배우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성인이 되어서는 늘 꿈을 꾸었으나 가보지 못했던 길! 그것은 바로 실내디자인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간을 기획하는 공간 디자인! 한 번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은 없었지만 효율적인 동선을 만들어 내고 공간 설계를 하는 일은 어디를 가든 머릿속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반사신경 같은 것이었다.


단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었음에도 나는 누군가의 집에 가든 사무실에 가든 매장에 가든 '이곳을 이렇게 나누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꾸몄을까?'를 먼저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공간을 머릿속에 그렸다. 아마도 정리정돈을 좋아하는 성격에서 발전되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넘치는 인류애(?)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이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으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모든 것은 시작되니 말이다.

 


[오래된 꿈은 어떻게 현실로 나왔을까]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에 혼자 있는 시간에는 백지를 꺼내놓고 가상공간을 상상을 하며 그려보는 일이 너무나 즐거웠다. 신혼집을 인테리어 할 때는 2박3일 동안 밤을 꼬박 새우며 온 정신과 시간을 다 바쳐 몰입했다. 새 아파트라 큰 공사는 없었지만 어느 구석 하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한 번은 인이 집을 짓을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다. 현장에 가서 컨설팅을 해 주었는데 내 권고대로 설계를 수정하여 집을 짓었다고 했다. 나중에 만났을 때 내 조언대로 별볼일 없던 벽에 창을 내지 않고 창문없이 아늑한 다이닝룸을 만들기를 잘했다며 너무나 만족스럽다, 현관입구와 안방 부분을 넓혀 미니서재를 들이길 잘했다고 고맙다며 몇 번이나 인사를 전해오기에 나에게 정말 소질이 있는 것일까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육아를 위해 한국에 들어와서는 친구가 산 오래된 아파트를 꼬박 2주를 초집중하여 큰돈을 들이지 않고 새 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을 해 준 적도 있었다. 선의로 하였지만 난 현장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너무나 행복하여 잠시나마 육아를 잊고 일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있다. 적성에 딱 맞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필요했다. 그랬다. 내 적성에 맞고 내가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며 할 수 있는 일을 더 늦기 전에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바심도, 설렘도, 그리고 낯선 길을 향한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더 이상 지금처럼 모든 것이 딱 맞아떨어지는 기회를 잡기란 어려울 것만 같았다.


배움에 끝이 있던가! 를 외치며 과감히 결정했다. 그냥 하던 분야 공부를 하라며 만류하시는 친정엄마를 설득했다. 이제 병치레 없이 쑥쑥 잘 크는 아이 덕분에 이런 여유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적성에 맞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여러 검색을 통해 실내건축기능사부터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내건축기능사라는 자격증은 건축분야에 입문하는 자격증으로 응시자격에 제한이 없었다. 비전공자에 마흔이 넘은 아줌마는 그렇게 강남역 동방디자인 학원으로 달려갔다.     


제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줌마는 등록을 마치자마자 한 강의실로 배정되어 들어갔고, 제도판 앞에 앉아 평행자 이름이 I자라는 설명을 들으며 그렇게 제도의 ABC를 배워나갔다. 단 하루 만에 제도 글씨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학원에서 개발했다는 동방체를 배웠으며, 수 백번을 연습하여 모두 같은 글씨체로 제도를 하는 그 학원 출신자 중에 한 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제도판 앞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흥미진진했으나, 한 달 차가 되면서부터 슬럼프가 오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도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까, 나는 왜 책이 없으면 그리지 못하나 등등에서 시작해 재능이 이렇게 없는데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제도 샤프로 작도한 후에 잉킹한 상태>



시험은 총 5시간 30분인데 그 시간 안에 한 번도 쉼 없이 도면 4장을 그려야 했다. 평면도, 입면도, 천정도, 그리고 투시도를 말이다. 모두 0.7mm, 0.5mm 제도 샤프로 그리지만 실내 투시도는 플러스펜으로 잉킹 후 뒤집어 마카로 컬러링까지 해야 했다. 당시 내 기준으로는 이 모든 걸 다 해낸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더 시간 낭비하기 전에 포기하는 것이 최선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사분들은 계속하다 보면 다 완성하게 되어 있다며 풀 죽은 나를 독려했다. "정말 나 같은 사람도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이지요"라고 되물으며 힘을 내 잘못 그린 투시도를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다.       


<정신없이 작도하다 보면 오른손 전체에 샤프 가루가 묻어나 알코올로 닦기를 반복했다. 제도판 앞에 앉으면 육아를 잠시 잊고 몰입할 수 있어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도법을 이해하기까지 수 백번도 더 오르내린 슬럼프]

실내 투시도는 도법을 이해하면 일사천리로 그려진다는데 나는 그 도법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2달째 즈음이었다. 격한 슬럼프가 왔다. 투시도 기본을 잡는 도법부터 천장 조명을 그리는 도법마저도 하루 쉬고 다음날 제도판에 앉으면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1주 정도가 흘렀을 때, 나 자신에게 분노했다. 이런 머리로 앞으로 더 이상 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한 달이 넘게 여전히 도법을 깨우치지 못한 채 질문을 반복하고 있는 나에게 그럼에도 한결같이 절하게 가르쳐 주는 강사들을 보기가 민망했다. 이런 바보 멍청이를 시험 합격까지 끌고 가야 한다는 저들의 부담감은 어찌할꼬... 별의별 걱정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제도를 했던 트레이싱지가 총 50장을 넘어갔을 무렵이었다. 집에 와서 밤새 그 날 한 수업을 복습하며 혼자 평면도부터 다시 그려봤다. 입면도, 천정도를 끝내고 새벽 3시께 투시도를 시작하는데 갑자기 쓱쓱 그려지기 시작하며 손이 저절로 움직여졌다. 그랬다. 마침내 도법을 깨우친 것이었다!! 머리가 아니라 손이 스스로 작업하는 것을 보면서 그동안 들인 인고의 시간이 보람과 희열로 바뀌었다.


 두 달 하고 2주 만에 혼자서 모든 도면을 완성할 줄 알게 되면서 모의고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고, 매일 1개의 과제 즉 4장의 도면이 5시간 30분 안에 쓱쓱 그려지기 시작했다. 점점 학원에 가는 횟수를 줄였다. 그리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서는 집에서 스톱워치를 켜고 5시간 30분 동안 과제를 완성했다. 그렇게 3-4일치 과제 12장을 들고 일주일에 한 번씩 학원에 가서 체크받았다. 시험 전날 세어보니 그동안 내가 그린 트레이싱지는 총 90장을 훌쩍 넘어섰다.   

 

90여장에 달하는 트레이싱지. 처음 제도를 시작하면서부터 시험까지 모든 기록이 담겨있다.


시험 당일 들고 간 시험도구들. 제도판까지 짐을 바리바리 싣고 실기시험장으로 갔다. 약간의 초코바와 초콜릿도 준비해 갔으나 9시부터 15시까지 먹을 시간은 단 1초도 없었다!



[에필로그]

늦게 도법을 깨달았던 이유로 남들보다 오랜 시간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랬던 덕분에 손이 시험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합격하겠다는 일념 하에 지금껏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실기시험에 도전하며 꼬박 3개월 동안 제도를 위해 강남역의 어느 강의실에서 온 시간을 바쳐야 했다. 좁은 공간에 있다 보니 비염이 심해져 휴지를 달고 살아야 했고, 시험 직전에는 일시적으로나마 후각을 잃었을 정도로 여러 희생이 뒤따랐다.


게다가 학원에서 제도를 하는 5시간 30분 - 7시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거나 또는 간단히 초콜릿 등으로 공복을 이겨내는 바람에 영양상태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더라는 여러 무용담을 뒤로하고 어쨌든 난 어제 최종적으로 실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게다가 85점을 넘었으니 60점 커트라인으로 합격만 바랬던 필요 이상 고득점이다.


이렇게 생초보자를 앉혀놓고도 3개월만에 합격자로 만들어 내는 동방디자인학원의 그 명성과 실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음이다. 멋짐뿜뿜하는 동방체도, 동방스타일의 실기작도법과 마카사용법도 모두가 신비롭기만 했다. 이 자리를 빌어 힘들 때마다 징징거림을 받아주시며 상담해 주신 원장님과, 까칠하기 이를데 없던데다 쉬지 않고 코를 풀어대던 아줌마 수강생을 엄청난 인내로 가르쳐 주신 강사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 길을 한 번 가보기로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던 2019년 8월 5일이 시작이었다. 실내 디자인과 교수님 추천으로 시작된 건축도장기능사(실기)와 실내건축기능사(실기+필기)라는 자격증 두 개를 지난 4개월 동안 모두 취득했다. 이것들이 앞으로 어떻게 쓰여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인생이 확 바뀌지도 않는 자격증인데 뭘 이렇게 열심히 했을까 싶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배우고 싶었던, 가보지 않았던 그 길을 향해 문을 열어 두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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