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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Jan 13. 2020

사무직의 배신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하여 [1]



그것은 완벽한 [사무직의 배신]이었다.


주 업무는 협상까지 이끌어 내고 조율하는 것이었다. 여러 업무를 다해냈어야 했지만 특히 비즈니스 미팅에서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전성기에 결혼을 했고, 능력인정받아 평가와 성과에서 최정점을 찍었을 즈음 임신을 했다. 출산 후 복직하여 일을 했지만 점점 아이와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에서 미안함이 커져갔다. 그럴수록 육아휴직에 대한 생각은 구체화되었다. 아이가 첫돌부터 아프기도 했지만 나 또한 아이에게 엄마가 가장 필요한 시기라고 판단하여 휴직을 결심했다. 


내 유년시절을 돌이켜 보면 난 늘 외로운 아이였다. 기억이 나기 시작하는 건 낮잠에서 깨어나면 엄마를 찾으며 혼자 울다 지치기를 반복했다는 것이다. 어린 나는 어느 날부터 엄지손가락을 빨기 시작했는데, 나쁜 습관이라며 혼났고, 그러다 보니 눈치를 보며 어딘가에 숨어 손가락을 빨아야 마음이 안정이 되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서라도, 자는 척을 하면서라도 몰래 손가락을 빨았던 나는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이 그리 외롭고 불안하였던가.


그와 같 무의식에 자리 잡은 유년시절의 결핍성인이 된 나를 힘들게 하는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을 서른 중반에 심리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으며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막연하게 자리 잡은 생각은 나중에  아이를 외롭게 두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런 나의 생각에 동의한 남편은 아이 18개월까지 24시간 함께 육아를 했다. 크게 뭘 하지는 않아도 남편이 아이와 유모와 함께 집에 있어준 덕분에 출산휴가 후 복직도 무리 없었다. (내 아이를 남의 손에 온전히 맡기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 년의 육아직... 그리고 복직은 하지 못했다. 여러 상황이 그러했다. 내 모든 우려와 달리 다행스럽게도 아이는 손가락을 빨지 않았지만 그렇게 일을 그만두고 나서 알았다.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다는 것을.




그런 경단녀가 다시 사회로 나가고 싶어 몸부을 쳤다. 솔직히 말하자면 육아로부터 해방될 수만 있다면 뭐든 다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만 도태되는 것 같아, 아무런 자극도 없이 육아라는 일상에 갇혀버렸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그 해 여름, 가족과 함께 모 호텔에서 체크인을 하던 중 단정하게 머리를 묶고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호텔리어에게 '일을 하고 있어서 너무너무 좋겠어요'라고 말을 건넸던 것은 진심이었다. 을 하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매일 밤 아이가 잠들면 인터넷을 뒤적였다. 다시 일하는 사람이었으면 했고 그렇게 나를 소개할 수 있는 타이틀을 되찾고 싶었다. 사회와의 연결고리 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다시 성실한 사회의 일원이고 싶었다.    


이후 아이가 몸을 회복하고 난 이후 힘을 내어 아이를 키우고 있는 친정에서 10분 거리에 일할 수 있는 모 공기업 공개채용에 지원하여 여러 시험을 보고 입사를 하였다. 그러나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설렘도 잠시, 소위 '현타'가 왔다. 소속이 생겼고, 을 다시 할 수 있음에 모든 것이 감사했지만 가슴이 뛰는 즐거운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이는 이미 마흔이 넘었고, '경력단절'이라는 경력을 가지고 있는 아줌마가 육아를 병행하며 원하는 일자리를 다시 찾기란 매우 어려웠다. 그때 [사무직의 배신]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잘 나갈 때는 밤새 메일이 차고 넘쳤다. 밀린 메일 업무처리를 하고 나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업무 전개도에 뿌듯했다. 그렇게 업무로 관계 맺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능력을 인정받을 땐 모두들 나를 필요로 하는 거라 착각했다. 내가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의지하던 사람들이 나의 그런 착각에 일조했다. 그런데 퇴사 후에 조금씩 뜸해지고, 아이 병간호를 하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려 보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렇게 업무를 하다 보면 인맥을 가지고 퇴사해서 회사를 차려도 잘 되겠어요!"라고 했을 때, 정년을 바라보던 직장 상사이자 인생 선배님은 "여기 출신들이 그런 생각으로 퇴사했다가 후회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현업에 있을 땐 엄청 잘 나가던 선배도 사실 나가보면 생각만큼 잘 안 되는 거지. 이 일이 그래"라며 섣부른 생각이랑 꿈도 꾸지 말라고 조언했었다. 내가 육아휴직을 한다고 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말렸던 분이기도 했다. 근무 중에 보면 이따금씩 얼굴도 모르는 OB선배들이 업무지원에 관한 도움을 요청하는 이메일이 발견되곤 했었다. 개인적으로 친분은 없어도 그럴 때마다 나름의 고뇌가 느껴지곤 했었다. 웹툰 [미생]에서 했던 '사회로 나오면 지옥이야'라는 말처럼 말이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경우지만 이젠 내가 그 상황에 놓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 사회경력은 인정은 하되 필요하지 않은 것임을 느꼈다. 몸 담았던 조직을 벗어나고 보니 정말이지 그 조직 외에는 어디에서도 그 빛나던 업무 능력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두고 일을 하러 멀리 다닐 수도 없었다. 물론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였지만 지난 경력을 인정받으며 제대로 된 직장을 다시 만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그때 깨달았다. 더 이상 직장에 연연하지 말자고! 이제 평생직장이 아닌 평생 가는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이다.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였다. 오래전부터 염두에 두어 왔던 시험을 준비해서 보거나 또는 이제라도 늦기 전에 기술을 배워 새로운 시작을 하거나. 물론 주변에서는 안전하게 시험을 준비해 보라고 독려다. 진즉에 남편도 지지했던 공부였다. 아이가 급작스럽게 또 입퇴원을 반복하는 바람에 시작도 못해보고 손을 놓았지만 다시 시작하면 2년 안에 승부를 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물론 24시간 이 시험에 매달리는 머리 팡팡 돌아가는 20대들과 경쟁할 생각에 많은 조건이 불리다. 여러 생각이 오갔다. 이 결정은 빠를수록 좋겠더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난 더 이상 안정된 직장을 찾는 것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마흔이 넘었으니 매월 급여가 주는 그 평온한 일상을 이제는 벗어나야 할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술을 배우 내 실력을 쌓던 어떻게든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편하게 살지 왜 힘든 길을 스스로 걸어가냐고 말렸다. 애나 잘 키우지 뭣하러 그러냐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어디까지일지 모르지만 고생길을 택했다. 새로운 시작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갑작스러운 계획 변경에 주변에서는 모두 놀라워했다. 하지만 나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내가 하겠다고 마음먹고 못 해 본 것도 없었다. 실내디자인학과에 입학하여 적을 두고 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강남역에 위치한 디자인 학원을 다니며 실내건축제도를 배웠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일단 해 보고 싶었던 공부를 하며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 나를 보고 친정엄마는 "애 걱정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용기와 힘을 주셨다. 아이는 저녁에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나를 볼 때마다 "엄마 힘내라 엄마 힘내라!!"를 외쳤다. 이 어린것이 뭘 안다고 이러는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하여 [2] 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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