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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Jan 28. 2020

가정방문업무 CS 매뉴얼

지킬 건 지키고 살아가는 예의에 관하여




아침 알람이 울리면 일어나 밤새 온 메일을 한 번 읽어보고 커피를 내린다. 커피를 마시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온 집안에 퍼지는 향이 좋아서다. 햇살을 온몸에 품은 블라인드를 걷고 아이를 깨우러 간다. 아하는 조건도 조건이라지만 이렇듯 유 있는 아침을 좋아하는 건 9 to 6를 살기에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등원시켜 놓고  커피향이 가득한 집 안 거실에 앉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계세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낯선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불편하다. 특히 무엇인가에 몰입해 있는 상태에서고요한 집안의 기가 흩뜨려지는 것이 싫다. 렇다고 약속한 일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아, 오늘이 바로 그 날이지'라고 생각하며 문을 연다. 담당이 바뀌었다며 새로 맡게 되었다는 정수기 관리 매니저(?)가 서 있다. 인사를 하려는데 순간 훅~ 냄새가 난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냄새였다. 아프리카에서 사람이 전해 줄 수 있는 온갖 냄새를 맡아보았다지만 한국에서 느껴보는 이 독특한 냄새는 좀 심하다 싶었다. 그렇다고 사람이 왔는데 입구를 막아 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면전에서 티를 낼 수가 없어 인사를 마친 뒤 정수기 위치를 알려줬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겨울이었다. 단독주택에서 한 겨울에 창문을 열어두고 살지 않는다. 기름보일러를 소비하는 집에서 겨울철 에너지 절약은 필수다. 따라서 아침저녁 정기적인 환기를 제외하고 모든 문을 닫아두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렇게 35평 집안에 두 여자가 있었는데, 점차 온 집안에 정수기 매니저의 독특한 채취(?)가 퍼지기 시작했다. 미리 드레스룸과 서재 문을 닫아 두기를 천만다행으로 잘했다 생각했다. 확산은 빠르게 진행됐다. 평소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라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플 지경까지 왔다. 그렇다고 미니 전동드릴을 돌려가며 분주히 일을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이게 무슨 냄새인가요?라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창문을 다 열어젖히는 것도 주저했다.




2014년 해외에사는 동안 새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 일이다. 직장 상사와 함께 업무상 이동을 해야 하는데 깜빡 잊고 집에 두고 온 물건이 있었다. 업무상 꼭 필요했을 것이다. 가까우니 가는 길에 잠시 집에 들렀다 가기로 하고 내가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다. 15층에 위치한 집로 올라가야 하는 엘리베이터가 하필이면 고장 때문이었는지 정전 때문이었는지 멈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한 마음에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 물건을 챙겨 다시 뛰어 내려왔다. 내가 정신없이 오르내린 구간은 총 30층이 되는 셈이었다. 온몸에 땀범벅이 되어 다시 차에 올랐을 때, 좁은 차 안에 나란히 앉아 있던 상사는 잠시 후 창문을 열며 말했다. "더워서 그런가 잠깐 환기를 해야겠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던 그 차 안에서 말이다.    


그때 나는 내가 땀범벅이 된 생리대를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 이후 상황은 더 이상 글로 표현할 수가 없다. 너무 창피하여 가시방석 같은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젊잖은 상사이자 인생선배의 배려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고마운 마음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더구나 그런 경험을 갖고 있는 내가 매니저가 어떤 연유로 한낮에 심히 역한 냄새를 갖고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를 물을 수 없었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아니면 어떤 상황을 이겨내고 왔는지를 묻지 않았지만 집안에 가득 찬 그 냄새를 견뎌내기란 실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처음 보는 사람을 혼자 두고 집 밖으로 나가 있을 수도 없었다.






프랑스에서 사는 동안 아침마다 빵집에 가면 호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정갈하게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빵을 사려 줄을 선 모습, 그리고 앞뒤로 그들에게서 나는 청결한 향이 늘 인상 깊었다. 나이 들어도 스커트에 스타킹을 신고, 립스틱을 바르고 외출을 하는 백발의 할머니에게는 일종의 자존심이었을 게다. 나의 체취로 상대를 불쾌하게 하지 않겠다는. 프랑스에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들에서 사는 동안 여러 사람이 모여 여러 기분 좋은 향을 맡을 때마다 '향은 타인에 대한 예의'라고 인식되었던 이유다.


특히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자리에서 양측이 정갈하게 (바르게) 입은 모습을 보고, 누가 먼저일지 모를 기분 좋은 향을 맡을 때마다 중간에 있던 나는 일이 잘 풀릴 거란 직감을 하곤 했다. 그만큼 나 역시 내 몸가짐에 신경을 썼다. 화려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적합한 복장에 깔끔한 향을 갖추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근무 중에 피부관리와 메이크업에 신경을 썼던 이유도 신뢰를 주는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신경 쓰고 산다는 것은 몹시 귀찮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살면서 귀찮아도 해야 할 때가 있다. 한마디로 '나는 중요한 일을 위해 관리하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표현해야 할 때는 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반지하의 냄새에 대해 오랜 시간 이야기한다. 그 영화를 본 어느 지인이 "영화를 보는 내내 제 냄새를 다시 맡아보게 되었어요"라고 했던 말은 사회계급을 날카롭게 표현하고자 했던 감독의 노련한 시선과 의도한 연출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 과외선생으로 소위 어퍼 클스의 집에 가서 느낀 봉준호 감독 그 개인의 경험에서 나왔을 것이라 난 확신했다. 사람 주는 체취에도 계급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 급 호텔을 들어섰을 때 압도당하는 것은 층고의 높이가 아니라 온 몸을 감싸는 고급스러운 향이다!


그와 반대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싸구려 호텔과 반지하의 퀴퀴한 냄새! 소득이 높아지면 좋은 것을 먹게 되고, 더 나은 주거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청결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청결에 대한 욕구는 이어 좋은 냄새, 향으로 연결된다. 우아한 향을 디퓨저로 들이고, 더 좋은 샴푸를 찾고, 기분 좋은 향을 주는 바디워시로 샤워를 하며, 고급 입욕제에 몸을 담그며, 고급 향수로 마무리하는 것! 인간 욕망 계급화의 한 단면을 향으로 보여주는 것, 당연한 귀결이다.


인도 경제학자인 나렌드라 자다브의 [신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저서를 보면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엄격한 카스트제도하에서 차별받고 살던 그의 할머니, 어머니에 대해 말한다.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버렁뱅이처럼 살던 습관들을 버리고 살림살이부터 시작해 집 안팎을 쓸고 닦으며 청결하게 살기 위해 했던 노력을 이야기한다. 그 변화는 실로 효과적이었으며, 그 가족을 중심으로 주변의 불가촉천민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묘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신분을 뛰어넘고 그가 그 자리에 올라 있기까지에는 그렇게 두 여인의 노력에서 시작되었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 책을 읽으며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법, 사람의 맑은 정신성을 만들어 내는 청결함 추구하는 가치를 인정하였던 바다.   




업무 특성상 타인의 집을 방문해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업무 매뉴얼이 엄연히 존재할 것이다. 길어봤자 1분에서 3분 대민업무를 하는 경우라도 청결하고 단정한 용모를 유지하는 것은 기본이다. 하물며 누군가의 집에 최소 30여분을 머물다 가는 업무를 하면서 자신이 어떠한 체취를 가지고 있는지를 몰라서야 되겠는가. 그동안 공기청정기, TV, 인터넷 수리를 위해 여러 기사분들이 다녀가실 때마다 그들마다 독특한 체취가 없지는 않았다. 때로는 담배냄새도 났고, 발 냄새도 났다. 그때마다 그것은 누구나 일하며 살아가는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반적인 범주 내에서 허용할 수 있는 냄새들을 가지고 까탈스럽게 문제 삼을 생각도 전혀 없었다.


재택근무하는 프리랜서는 자유롭다. 입고 싶은 대로 걸치고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든 번역을 하든, 만화를 그리든 아무 상관없다. 콜센터 직원과 통화를 할 때 그가 어떤 옷을 입었고 밥 먹고 양치를 했는지 묻지 않는다. 각 업무마다 특성이 있다. 그만큼 업무 특성에 맞는 CS 매뉴얼이 있을 터. 매뉴얼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데 기본을 지켜주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문제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으로 요즘 고객은 근로자에게 예를 다해 상담을 문의하고 답변 또는 관리를 받는다. 그런데 왜 남(고객)의 집에 들어오면서 근로자는 지켜야 할 그 기본을 갖추지 않가.


그분이 일을 다 마쳤다며 떠날 때 잘 가시라 인사하고는 즉시 온 집안 창문을 다 열고 환기를 했다. 하지만 표현 못할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한 바구니 세탁하여 일부러 널어도 놓았다. 30분 머물다 떠난 사람의 강한 체취는 여운마저 길었다.


다시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고민하다 그분이 혹여나 다른 고객에게 더한 불쾌함을 전달하지 않도록 내 의견을 해당 팀장에게 전달했다. 다음 점검 때는 다른 매니저로 교체하겠다는 제안에 같은 사람이 오든 다른 사이 오든 상관없다고 답했다. 향수를 뿌리고 와 달라는 말도 아니라고 했다. 누가 오든 그저 기본적인 업무 매뉴얼 지켜달라고 말했다. 


타인의 영역, 공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에 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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