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쌍 May 08. 2020

Going gray 되는 시간들...

나이 들어가는 나를 위한 변명(?)



행복하게 나이 드는 일은 새벽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닮았다.


라고 말했던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 (Victor Hugo)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하여 80세 넘어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유명한 색정광으로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하였더라니 부와 명예를 가졌던 그에게 그러한 나이듬은 정말이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40대 초반을 살아가는 평범한 에너자이저 육아맘의 현실은 말이다. 20대에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막상 내 인생의 황금기라 생각했던 삼십 대를 지나고 보니, 시들어 나이 들고 있음을 거울에서 가장 먼저 느끼게 된다. 그때 현실과의 괴리를 느낀다. 마음은 여전히 내 인생의 전성기였던 삼십 대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까닭이다. 이래 봬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어른들이 하던 말이 실감 나고 공감함에 웃프다니 나 어떻게 마흔 중반을 시작하고 받아들야 할까.


거울 앞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지친 표정이 아니라 흰머리였다. 흰머리를 처음 발견한 것은 서른 후반이었을 테지만, 그건 머리카락을 한참 뒤적여야 보이는 것이었다. 육아 2년 차에는 머리카락을 들추면 군데군데 보여 몇 번 재미 삼아 뽑아 보기다. 리고 육아 4년 차가 되니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정수리에서부터 흰머리카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감출 수 없는 흰머리들의 향연이 시작된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푹 빠져 수십 번도 더 읽었던 황미나 만화가의 위대한 역작 [불새의 늪]에서 '실버 블론드'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접했더랬다. 너무나도 우아한 실버 블론드가 왕실 일란성쌍둥이 비극 남매의 표식이었더라니! 아마도 은발에 대한 환상은 그렇게 생겼나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자연스러운 흰머리를 유지하는 이콘이 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언론에 처음 등장하였을 때 그 희열이 올랐다. '와! 멋지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분명 나도 반백이 되더라도 저렇게 될 수 있어'라고 생각했다.  


그런 덕분에 흰머리가 나이 드는 아름다운 표식이라 생각하여 '나중에 염색은 하지 않겠어. 흰머리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겠어'라고 다짐했다. 그때는 나의 그런 결심에  심리적 당당함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겪어 보니 그것은 무모한 패기였다. 거울에서 내 얼굴보다 흰머리가 먼저 보일 때마다 우울함이 오르내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 외모에서 느껴지는 나이 드는 과정이 낭만적이거나 여유로운 감정이 아닌 것이었구나'를 문득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요 근래 흰머리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새치 몇 가닥을 상대하던  당당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우울하고 서글픈 감정들 뿐이다. 아이는 아직 네 돌도 안되었는데 그 손을 잡고 걷는 엄마는 흰머리카락들이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노라니 이 모든 것이 마흔 초반에게는 벅차다. 다시 말해 나 아직 나이 들어갈 준비가 안 되었는데 어쩌자고 머리카락은 이렇게 빠르게 고잉 그레이 (Going Gray)가 되고 있는 거냐는 말이다.    




사실 머리카락의 3분의 1이 흰머리카락으로 변했음에도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보이는 데다, 눈을 많이 사용하다 보니 시큰거리는 증세를 쉽게 느낀다. 게다가 한 번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이 한 달에 한 번꼴로  염색을 해야 한다는데 그것이 내키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까. '내 차라리 나이 들어 보여도 좋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련다'라고 외쳐야 하까. 우울함과 젊어 보인다는 희망과 기대의 중간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독일에서 지낼 때 일이다. 지긋 지긋한 추위, 비가 오는 날씨가 어우러진 우울함에 치를 떨며 지내는 나를 친딸처럼 예뻐해 주던 분이 계셨다. 어느 날 만나니 그의 상징과도 같았던 검은색 짧은 커트머리가 흰머리로 변신 중이었다. 그분이 말씀하셨다.


"마흔이 넘은 아들이 어느 날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는데 보니까 흰머리가 부쩍 올라와 있는 거야. 깜짝 놀라 안쓰럽게 아들의 머리칼을 만지다 문득 깨닫게 되더라고. 아니 아들이 저렇게 흰머리가 나오는 나이인데, 일흔을 앞둔 그의 엄마인 내가 새카맣게 염색을 하고 다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그때부터 염색을 안 하기 시작했어. 흰머리 밖에 안 보여도 좋아. 이게 자연스러운 거라는 걸 알게 되었거든"


그때 나이가 들어도 멋생각하고 성찰하고 자신의 행동을 그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그분이 굉장히 존경스러웠다. 그분의 그와 같은 유연한 사고와 어른됨이 나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던 터, 나는 생각한다.  


론 내 머리에서 새치가 모여 흰머리가 되고 그것이 우아한  실버 블론드가 될 확률은 제로에 가깝겠지만, 자연스럽게 실버 블론드와 비슷해진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생의 3막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머리칼의 색깔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유연한 사고일 것이라고.


요즘 부쩍 유아 티를 벗고 소년이 되어가는 아이에게 물었다. 엄마가 이렇게 흰머리가 많은데 어떠냐고. 그러자 아이는 "에이~ 엄마, 괜찮아요~"라고 쿨하게 답한다. "진짜 괜찮아? 엄마 흰머리 더 많아지면 할머니 같아질 텐데 창피하지 않겠어?"라고 물어봤지만 아직 네 돌이 되지 않은 아들은 괜찮다고 한다.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이를 위해서 필요하면 염색을 해야 하지 않겠냐 답했던 남편과는 다르다.


태어난 이상 나이 들지 않을 수는 없다. 신체 노화의 속도에 내 마음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서글퍼 말자. 그보다 어떤 정신성을 갖고 살아갈 것이며, 유연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을 놓지 않고, 고리타분한 노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차라리 더 멋진 선택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에게도 언젠가는 이 모든 서글픔을 딛고  나이 들어가는 것이 새벽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느껴지게 되는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과 정신적인 여유에서 비롯되리라. 그때가 되면 내 머리 위에변주된 실버 블론드(?)가 값진 인내로  스스로에게서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염색에 매달리지 않고 흰머리로 당당하게 삶을 누리는 편을 택하는 게 좋겠더라는 생각을 정리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그리고 거울 속 나에게 말할 것이다.  

"고잉 그레이 Keep going!"

작가의 이전글 브런치를 만난 지 3개월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