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뿌쌍 Jun 08. 2020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했다

아들, 엄마는 줄에서 내려오고 싶었다고!


세 번째 실외 인공암벽장을 찾은 날은 좀 더 특별다.

15m 노란색 초보 코스를 이번엔 직접 퀵드로에 자일을 걸며 올라가는 선등 작업(?)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지난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라이밍에 입문하게 도와주신 선배께서 코치하는 대로 부지런따라왔다. 그리고 매번 그래 왔듯 세번째 실외 암벽장에서 생초보 난이도 2에 해당하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셈이었다. 뭐든 배울 땐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보니 알려주시는 대로 하네스에 자일을 연결해 8자 이중 매듭에 옥매듭을 조금씩 직접 해 보고, 음처럼 그래왔듯 어떨결에 겁도 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선배님의 외침을 들으며 힘을 내어 올라 선등 1차가 완성되었고, 두 번째는 선배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온전히 내 집중력만으로 판단하고 끝까지 오르는 방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코치하셨다. 덕분에 삼지점에서 팔을 쭉 뻗고 손 털기를 하는 것에 조금은 더 익숙해졌다. 한 번, 두 번 완료 후 내려올 때마다 여러 선배들께서 한 마디씩 일러주시는 충고를 새겨듣다 보니 홀드 잡기를 반복하는 동안 발을 디디고 힘을 내어 오르는 방법에 대해 조금씩 몸이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번째 선등 작업을 완료하고 내려오자, 이번엔 빨간색 레벨 2단계에 도전해 보라 다.


네? 아직 준비가 안되었는데요...


하는 표정으로 선배님들을 바라보자 클럽 초대회장님께서는

 

"암튼 뿌쌍은 깡이 좋아. 그래, 저렇게 깡이 있어야 올라가지. (나를 클라이밍의 세계로 인도한 선배를 바라보시며) 앞으로 이렇게 깡 있는 사람들만 잘 골라 데려와요"


라고 말하는 바람에 주변에 사람들이 다들 웃었더랬다. 나를 인도하신 직속 선배님은 흐뭇한 표정을 지다. 덕분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안도했다.


초보자의 자세란 모름지기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우선이라 생각하여 일단 알겠다 답하고 쉬는 동안 빨간색 홀더들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선배님들의 공통된 이야기처럼 이밍에서 남이 하는 걸 보는 건 너무나 쉽다. 조금만 더 하면 다 오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은 사실 앉아서 남들이 하는 모습을 암벽화를 벗어놓고 유유자적 관전하고 있을 때뿐이다.


"자, 충분히 쉬었으면 이제 준비하세요~"


라고 선배님의 소리가 들리자마자 화들짝 일어나 암벽화부터 단단히 갖춰 신었다. 그래, 까짓 거 저 빨간색 레벨 2코스도 한 번 해 보자고 다짐하며 손으로 힘차게 궁둥이를 털었더랬다. 실 내심 자신감이 충만한 것에는 작은 신체조건도 조건이라지만 타고난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손에 땀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손에 땀이 나지 않으니, 액상이든 가루든 초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선배들이 홀드를 잡고 힘겹게 매달려 한 손을 연신 하리뒷춤에 달아놓은 초크통에 넣었다 빼는 번거로움을 적어도 나는 생략할 수 있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큰 무기가 되었고, 자신감으로 나타났다.


제작되는 암벽화 사이즈 중에 가장 작다! 아이가 이 신발을 신고 깡총거리며 뛰고 걷는 모습은 깜찍 그 자체였다. 클라이밍 미래 꿈나무의 위대한 시작!


그 때 어린이집 오후 일정을 빼먹고 엄마를 따라 인공암벽장에 함께 온 아이는 그의 생애 첫 암벽화를 신고 신나게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다음 주부터 수출신의 젊은 코치로부터 본격적으로 클라이밍 레슨을 시작하기로 하였기에, 미래의 꿈나무라며 망스런 아이의 모습을 선배들 모두가 흐뭇하게 바라봐 주셨더랬다.


"아들, 엄마 해 볼게. 잘 봐"


라고 말하고는 빌레이를 봐주시는 선배와 인사하고 빨간 홀드를 잡기 시작했다. 이번엔 퀵드로에서 자일을 하나씩 풀며 올라 보라 했다. 아직은 퀵드로자일을 거는 것도, 푸는 것도 어설펐지만 몇 번이나 더디게 진행하면서도 다행이 큰 실수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집중해 오르다 보니 한두 홀더만 더 잡고 발을 디디면 달팽이라고 부르는 정상에 걸린 자일 밑에서  손을 하고 완료를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쉬운가. 초급 코스처럼 한 손에 딱 걸리는 홀드가 아니다 보니 갑자기 머리속이 하애졌다. 손에 힘이 빠지며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그만 내려갈까 망설이면서도 응원하는 선배의 외침에 조금 더 힘을 내어보기를 반복하였지만, 힘이 다 빠진 터라 한참을 머뭇거리다 내려가겠다고 소리쳤더랬다. 음치고는 충분하다 생각하셨던지 선배께서 하강을 외 후에야 안심하며 마음을 푹 놓고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내려지기를 기다리는데, 어랏~ 내려가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라면 벌써 발바닥으로 벽을 툭툭 치며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을텐데, 도 없이 매달려 있으려니 불안이 찾아왔고, 조금씩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이상히 여겨 빌레이 하는 선배님을 15m 높이에서 아찔하게 내려다보노라니, 선배가 잡은 줄 뒤에서 아이가 줄을 이어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아이 딴에는 선배가 빌레이 보는 모습이 재미난 놀이라 생각되었나 보다. 선배는 "시하야, 줄을 놔야지 엄마가 내려와요" 라며 매우 친절하게 말씀을 하고 계셨 것이 틀림없었다. 미루어 짐작하건, 분명 아이는 젠틀한 선배의 부드러운 권고는 장난이라 생각되어 줄을 빨리 놓을 것 같지가 않았다.


저 상황에서 아이를 진정시킬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생각했다. 어느 선배들도 아이 엄하게 야단치지 않을 터... 그의 엄마 밖에는 아이가 말을 들을 사람 없는 까닭이었다. 결국 나는 15m 높이에서 아이에게 소리쳤다.


"시하야, 줄 놔. 얼른 줄 놔야 엄마 내려갈 수 있어. 엄마 이젠 무서워"


그러나 줄은 미동도 않고 아이의 까르르 웃음소리만 15m 높이까지 들려왔다. 그러기를 약 1분여, 난 줄에 매달려 있는 상태로 있는 게 점점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데  아이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낭만적으로 들릴 리가 있겠는가.


그 순간  안에서는 살겠다는 의지로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15m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도 모르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


" 야 이 xx야!!!! 빨리 줄 놔!! 줄 놓으란 말이야 야야야 아아아아아!!!! 너 빨리 줄 안 놔? 빨리 놔 아아아아아 야!!!!! 이 xx 너 엄마가 내려가면 가만 안 둘 거야!!!! 야야야아아아아악~~~"


엄마의 다급하고 저속한 비명에 아이는 사태의 진정성(!)을 파악했던지 서둘러 줄을 놓았고, 그제야 나는 조금씩 하강, 즉 내려지기 시작했다. 대지에 가까워질수록 깊은 안도가 찾아왔고, 두 발을 바닥에 디디고 일어선 후에야 하얗게 질려 있던 내 얼굴은 평온을 되찾았다.


그렇게 심각했던 상황이 종료되고 나서야 선배님도, 아이도 나도 모두가 빵 터져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평소 내가 쓴 책을 감동 깊게 읽으셨다며, 늘 후배가 아닌 '작가님'이라 분에 넘치게 불러주시고, '작가님은 지적인 이미지'라고 표현하시며 좋게만 보아주셨던 그분 앞에서 내 '날것'의 모습을 보였더라는 부끄러움이었을까나, 되려 마음 편해지는 솔직한 시간이었을까나. 초급 이도2 레벨은 성공 못하고 내려왔더라지만, 예기치 않은 상황속에서 터져나온 모습(!) 덕분에 짐을 정리하는 내내 어찌나 웃음이 터졌던지 경쾌하게 마무리된 연습이었다.


초보코스 첫 선등을 축하하다며 평소 맛있게 먹던 단골 칼국수 집에서 밥을 사주시던 선배님께 감사를 전하며, 비록 이미지 메이킹에는 실패하였더라지만, 비로소 두 발로 땅을 밟고 서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쨌거나 라이밍은 계속된다.

작가의 이전글 편식을 위한 변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