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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Sep 18. 2020

나는 이제 막일(노가다)을 합니다

사무직의 배신에서 시작되어 창업으로 이어지기까지 그 숨가쁜 여정



'도카타'라고 읽는데 이 '도카타'가 변형되어 사용되면서 '노가다'가 되었습니다. 일본말의 잔재이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1. 무슨 일을 반복되게 행하는 걸 말함
2. 힘들고 고된 일을 흔히 지칭함


국어사전에서는 '노가다'라는 표현을 쓰지 말라  권장하고 있다. 머리로는 100% 공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일본말의 잔재를 쓰지 않고는 이 글을 완성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현실은 '노가다' 그 체험 삶의 현장 100% 이루어진 하루하루가 벌써 두 달째다. 그리고 익숙해졌다. 건축현장에서 쓰는 그 용어들에!


이 시작되자마자부터 들려왔던 낯선 표현들!

 '아까징기', '데나우시', '가네', '야기리', '빠루', '미쓰모리', '덴죠오', '다루끼', '욤부', '오비끼', '도와꾸', '데모도' 등등 공 시공을 위한 첫 미팅(!)부터 목공팀 리더, 이른바  '오야지'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이러했다.


"다루끼가 뭔가요?"라고 너무나 진지하게 물지만,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든 것이 낯설었지만 어느 분야든 기본은 같은 곳에서 시작한다. 눈치껏 목수들의 일을 하나씩 파악했고, 빠르게 응용하기 시작했다. 건 필사적이었고 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내 생에 첫 창업이고, 꼬박 일 년을 바쳐 준비해 온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는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1. 에서 깨달은 것들


런데 그 모든 것 이른바 '노가다판'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닷새밖에 걸리지 않았다. 벽을 만들어 세우고, '덴조'를 올리고, 천정을 막는 목공 작업(공간을 분리하는)이 끝나고 나니 내 몰골은 더 완벽해졌다. 허름한 바지에 땀에 흠뻑 젖었다 말랐다를 수도 없이 반복하 늘어난 티셔츠, 먼지를 뒤집어써 생의 근원을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운동화를 신고 설계한 도면을 설명하며, 매 순간마다 카리스마 넘치는 '오야지' 목수와 의견을 나누는 '노가다꾼'으로 변신하는데 정말이지 닷새면 충분했다.


그런 틈틈이 한편에서는 석고보드를 일일이 칼로 잘라 정리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내 몫이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날에는 밤새 온몸이 녹아내릴 듯했는데, 근육을 혹사시키는 육체노동을 하면서 정리와 청소가 현장업무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목공이 얼마나 중요한 마감을 만들어 내는지를. 그리고 바닥과 벽은 절대로 수평도 수직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사람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그 한 끗 차이가 아주 커다란 마감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인테리어 공정에서 목공 작업과 셀프 레벨링의 중요성에 대해 현장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여러 사건들을 겪은 것은 너무나 중요한 수업료였다. 그리고 그 현장이 내 전시장 인테리어 현장이라 차라리 다행이었다. 뜯고 다시 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였던 것은 인건비와 자재비가 추가된다는 저질스런 경제학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그냥 넘기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반장 맘에 안 들면 뜯고 다시 하는 게 맞아"라고 말하던 목공팀 리더, 런 과정을 통해 목공 오야와 나는 절친이 되었다.




2. 첫 고용과  해고 경험하다


목공 첫날부터 내가 업을 준비하며 믿고 의지했던 중요 직책을 맡긴 그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덕분에, 공사를 시작한 지 단 하루 반 만에 그 고용에 대해 의문을 품는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목공 둘째 날 밤을 꼬박 새워 준비해 '오너의 마인드가 무엇이 다른지 보여주겠어'라고 수 백번을 더 되새기며, 삼일째부터는 직접 작업지시를 진행했다. 50대 후반인 그분에게 현장 믿고 맡기고 난 설계 &마케팅과 경영을 하려 했던 분업이 무의미해졌다.


현장을 지키지 않고 출퇴근 시간이 그 마음대로였던 그 한 달 참아내는 동안 계획에 없던 공정을 대부분 혼자 처리해야 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지만 인부들이 마무리를 해야 할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남겨두는 바람에 현장일은 계속 늘어졌다. 게다가 정작 그 일을 하지 않고 미뤄두는 바람에 그걸 보다 못한 내가 하기 시작했고, 시간은 없어졌다. 내 입장에서는 인건비를 들여 일을 시키는 것이 무의미한 지경이었다. 


퇴근이 10시, 11시, 12시, 새벽 1시, 3시까지 늘어났고, 새벽 4시에 들어와 씻고 잠들어 8시에 출근하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른바 노가다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덤빈 ' 키우던 여자가 창업'을 한다고 했다니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로 만만하게 보였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증빙 없는 돈을 쓰겠다며 현장 운영비 명목으로 현금다발을 요구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주변의 인맥을 활용해 정보를 확인했고, 나는 더 독해졌다.


새벽에 들어와 잠시 눈을 붙이고 퀭 눈으로 아침밥을 먹는 나에게 "현장소장이 있는데 네가 왜 그렇게 일을 하는 거니?"라는 아버지의 물음에 머리가 확 깨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상황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렇게 공사를 시작한 지  달째, 그런 나를 지켜본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결정을 했다. 혼자 해 보겠다는 쉽지 않은 결단이었지만, 아무리 현장 경험이 많다고 해도 내가 그보다 못할 것 같지 않았다. 믿고 의지했던 첫 고용이 한 달 만에 첫 해고로 이어지며 어느덧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리고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질끈 동여맨 상태로 얼떨결에 개업이 되었다.




3. 감사한 사람들


점차 노가다꾼의 외양 완벽하게 갖추게 되었다. 날렵하게 빠진 9cm 하이힐을 신고, 우아한 향을 풍기며, 외국어로 비즈니스 상담을 중재하던 그 소싯적 커리어 우먼은 더 이상 찾아볼  없다. 상에서 우기만 했던 여자가 현장에서 꼬박 두 달을 보내는 동안 루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노가다적합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럴수록 주변에는 감사한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


정말이지 애나 키우던 아줌마를 (첫 미팅 때 친정엄마가 바쁘셔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 가능성이 있다 판단하고 한 사업체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하며 원석을 깎듯 발굴하여 주신 원근수 팀장님, 그리고 한 팀이 되어 그 뜨거운 여름 보내는 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늦은 시간까지 함께 고민하며 '아뜰리에 드 뿌쌍'이 모양을 갖추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하여 주신 정주영 TR님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과 함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으로 급하게 전화를 해도 하나하나 설명해 주시며 무지한 나에게 현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던 춘천 엣홈의 김혜경 사장님, 이 분이 아니었으면 욤부로 마감했어야 할 자리를 석고보드로 마감할 뻔했던 덴조였다. 그리고 촌철살인으로 각인되는 분당에서 일을 배우던 시간들,


또한, 혼자 닦을 엄두가 나지 않던 높이 4m나 되는 창문을 앞에 두고 좌절하고 있는 상황을 듣고 달려오셔서 함께 닦아주신 엄종오 사장님, 고민을 들어주시고 큰 결정에 힘을 보주시며, 많은 장비들을 지원해 주신 윤경우 사장님, 일 년 만에 전화를 드렸음에도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이틀 동안 전기작업부터 월 플러스 시공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함께 완성해 주신 박홍선 선배,  한결같이 기다려 주시며 언제든 배고프면 연락하라고, 뭐든지 사서 달려오겠다고 말씀해 주셨던 김한천 선배님,


그리고 내가 밖에서 집중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던 엄마, 그리고 아빠! 이 분들이 없었다면 창업후기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힘든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었던 나의 가족, 더 특별하게는 늦게 들어오는 엄마를 이해해 주고, 늘 사랑한다고 말해 주며 꼭 안아주었던 사랑하는 아들 시하!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며, 잖아 내 아들이 엄마를 자랑스러워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4. 새로운 도전과 시작


앞으로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노가다판'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미래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 활기 넘치는 매일을 살고 있다. 마흔 넘어 내 적성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은 그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성취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경험과 축적된 역량으로 나의 첫 창업을 끝까지 완성해 나가겠다는 다짐!


이따금씩 코에 검은색 먼지가 가득한 채로 세안을 할 때면 너무나 서러웠고, 한 번에 먼지를 너무 많이 마셔 며칠 동안 밤새 기침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던 날도 있었다. 이몸이 힘들 때면 아이 키우며 우아하게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지 무엇하러 이 일을 시작했을까 자책하기도 했었다. 럴 때마다 의 늪에 빠지지 않지 위해 더 나아지는 길을 생각했다. 차피 이젠 돌이킬 수도 없....


그 방향은 대학원 진학으로 이어졌다. 창업을 준비하며 건축을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이 커졌기에 인근 건축학과 대학원에 지원하여 면접 당일 비전공자임을 우려하는 교수님들을 마스크를 쓴 채로 설득했다. 꼭 논문을 쓰고 싶다며 일부러 일반대학원에 진학한 이 독특한 학생을 받아주신 덕분에 매주 교수님들과 비대면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정말이지 시간을 쪼개 대학원 수업에 할애하고 있지만, 학생보다 더 열성적인 교수님들의 관심과 격려 덕분에 건축학에 입문하는 1:1 과외 수업의 매력에 푹 빠져 지내는 중이다.


개업 이후로 본격적인 운영을 시작한다 할 것도 없이 일이 밀려들면서 채용한 직원과 함께 정신없이 현장을 삐 뛰어다니며, 하루 종일 상담하고 실측하고, 밤새 설계를 하는 새로운 일상을 보내며 다짐한다. 이것이 행복이라고! 그래, 난 이렇게 제대로 된 일을 다시 하고 싶었던 것이고, 그것이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즐기고 있는 것이라 말이다. 타고난 기질 때문인지 사람들을 만나며 충전되는 에너지는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외쳐본다.

"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다"




이상 마흔에 출산하고 아이를 키우 오랜 기간 취미로 셀프 인테리어 & 리모델링과 가구 디자인 & 목공 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전문가가 되어 보기로 결심하고, 도전하여 일 년 만에 필요한 자격증들을 취득하고, 창업에 성공하 [아뜰리에 드 뿌쌍]이라는 한 회사의 대표가 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된 어느 아줌마의 '노가다판' 출정 후기다.



'기술이 최고야'로 시작한 [사무직의 배신]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고운 우리말로 순화하지 못함에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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