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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뿌쌍 Nov 30. 2020

막일 (노가다판) 출정 후기 2

창업 3개월에 쓰는 극한 노동 리얼리티 현장 이야기



나는 노가다를 한다.


그렇게 한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

해 보니 대표가 된다는 것은 행정적인 절차로 보자면 별거 아니었다는 것과, 창업하면 아주 '다양한' 각종 세금을 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알지 못했던 많은 고지서들이 날아들기 시작하면서 깨달았다. 내가 더 이상 이 사회에서 숨만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을!



창업한 지 다섯 달째, 그리고 본격적으로 운영을 시작한 지 세 달째를 마감하면서 겪은 기막힌 수많은 일들을 어찌 다 말할 있겠냐마는 '막일(막일)'라는 업종 특성상 나타난 변화들부터 후술 하고자 한다.



1. 알람이 필요 없어졌다.


침대를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나는 그만큼 여유 있는 아침이 좋았다. 즉, 하루를 비하기 위해 침대에서 최대한 뒹굴며 여유를 갖는 시작이 좋았다. 물론 육아가 시작된 이후로 그 귀한 늦잠 (la grasse matinee 라 그라스 마티네)을 되찾아 올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 있는 아침시간마저 앗아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노가다판에 들어서자마자 매일같이 아침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전화벨이 먼저 울리기 시작했다. 것은 고요했던 내 세계를 뒤흔드는 놀랍고도 경이로운 것이었다. 매일 이른 새벽부터 나에게 전화를 하는 사람들...


"여기 배송 기사인데요, 정확한 위치가 어딥니까?"부터 시작해 "오늘 ㅇㅇ현장 시공 기사인데요, 출입문 비번이 어떻게 되나요?", "현관 앞에 그냥 놓고 가도 되나요?", "여기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해요?" etc...


처음 창업을 준비하면서 운영시간 시작을 오전 10시로 정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누가 싱크대를 사러 새벽 댓바람부터 사무실에 오겠냐는 것, 두 번째는 그래야 아이를 충분히 케어하고 어린이집 등원까지 함께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기대만으로도 육아와 일을 완벽하게 해 낼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마치 북유럽형 워킹맘이라도 된 것처럼 뿌듯해했다.


하지만 노가다판 현장은 새벽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노가다 경력 30여년차인 지인은 30년  평생 새벽 5시 이후로 일어나 본 적이 없었노라 일러줬다. 그 세계가 어떠한지 절대로 알 수 없었던 쌩초보였던 나는 그렇게 매일같이 계획에 없던 모닝콜(!)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리고 낯선 변화들에 익숙해질 틈도 없이 그것은 나의 루틴이 되어 버렸다.


전화벨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 눈꼽 뗄 시간도 없다 아무 옷이나 대충 꿰어 입고 집을 나서며 생각한다. 노가다를 시작한 이상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그들은 잘못되면 단 1% 책임소재라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에 현장으로 내달리기를 삼 개월째... 초보 노가다꾼 일상이 무너져 버렸다.



2. 교통사고를 경험하다


여러 현장이 생겨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정신없음이 시작되었다. 평소 철두철미했던 내 본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새벽부터 일어나 하루 종일 전화에, 사람들한테 시달리다 저녁 늦게까지 발주하고 설계하다 보면 잠은 턱없이 부족했다.


점점 뇌가 쪼그라드는 느낌으로 지내다 보니 매사에 짜증이 늘었고, 기억력이 현저히 감퇴했다. 저녁에 설계하려 실측 노트를 펼치고 보면 당일 그 현장에 다녀왔던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그와 같은 경험을 하면서 내 몸이 심각한 상태라고 인지하게 되었다.


그 무렵 첫 번째 교통사고가 났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다 보니 뻔히 아는 길을 돌아가며  운전할 즈음이었다. 회전교차로에서 내 과실로 인한 접촉사고가 났다. 가벼운 접촉사고라 상대측에서는 별다른 요구 없이 보험회사에서 원만히 해결했다.


다만, 내 차는 운전석 도어찌그러 상태였는데, 일주일 동안 차를 수리해 준 공업사에서는


"이 차는 한정모델이라 이제 부품(몰딩)이 단종되었어요. 부품 구하기 힘들 테니 앞으로는 조심해서 타셔야 할 거예요" 

 

라고 충고했다. 네네~ 감사한 마음으로 차를 찾아온 다음날 두 번째 교통사고가 났다. 빨간색 신호등을 보고 멈춰 서고 나서 잠시 후에 온몸이 튕겨져 나가는 충격을 받게 된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파악한 것은 아마도 30여 초가 흐른 다음이었을 것이다. 인지력을 상실한 상태로 미동도 않고 핸들만 붙잡고 있던 나에게 누군가 와서 차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네? 네..."


그 사람이 내 차를 들이받은 뒤차 운전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차를 도로 한편에 세우자고 이야기했고, 나는 비상등을 켠 채 파킹을 하자마자 보험회사 현장출동을 하는 내 담당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이 쏟아졌다.


"선생님 저 또 사고가 났어요"


그러자 그분은 차분하게 나를 진정시켜 주시며 그 즉시 달려왔고, 그 근처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 직원도 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나는 직원과 함께 렌터카를 타고 현장을 마무리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고, 잠에 들었다는 것, 그리고 이튿날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내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3. '을'로 사는 서비스직의 비애를 느끼다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인테리어를 시작한 지 석 달 남짓, 나는 을로 사는 서비스직의 '비애'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ㅇㅇ이랑 계약했죠"


때때로 소위 블랙컨슈머 앞에서 비참함을 느낄 때도 있다. 아주 작은 트집을 잡아 무리한 보상을 요구하는 건 기본이다. 실수는 했지만 아무런 책임은 묻지 말라며 오로지 본인이 받아야 할 일당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현장 인부와 클라이언트 사이에서 모든 원망과 책임을 져야 하는 내 역할에 좌절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새로 이사 오는 집에 이전 사람이 사용하던 기름때가 덕지덕지 뭍은 1~2만짜리 후드 망을 우리가 가져갔다고 (본인의 심증으로) 주장하던 고객도 있었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단정 지으면 그게 진실이 되느냐고 되묻자,


"긴 말 안 할 테니 빨리 가져다 놓으세요"


라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고 본사에 항의한 사람도 있었다. 물론 이런 경우는 내가 받을 피해가 1도 없지만 남이 사용하던 기름때 은 후드 망을 어떤 이유로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인지 안타까웠다. 무고죄로 고소하고 절도가 이루어졌음을 입증해 내라고 하고 싶었을 정도로 깊이 분노했지만 이 또한 바쁜 일상에 차차 잊혔다. 


아무리 아낌없이 다 해줘도 당연한 것을 왜 더 해주지 않냐 요구하는 일부 클라이언트들에게서 인간의 이기심 그 끝을 보며 씁쓸해한 적도 있다.


그러면서 반성했다. '아~ 예전에 내가 저런 모습이었겠구나...' 어쩌면 깐깐하고 세상 완벽할 것처럼 주변을 피곤하게 했던 의 지난 모습, 그간의 업을 지우라고 하늘은 나에게 이런 시간을 만들어 주셨는가 보다...라고 생각다. 남들에게 함부로 굴며 소비하던 시간에 대해 자아성찰의 시간을 보내며 덕을 쌓고 있으니, 이 시간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겠다.


또한 감동을 주는 좋은 클라이언트들도 있고, 일을 통해 다양한 많은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교류하게 되었으니 이 일을 시작한 것을 물론 후회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현장일을 하면 할수록 발전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자신감으로 가득 채워지는 순간엔 희열마저 느끼게 되노라니 이 일이 힘들어도 내가 좋아하고 매력적인 업무인 것만은 확실하다.



4. 직도 구시대적 막일로 사는 사람들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이전부터 소위 '막일꾼'들과 교류하는 일을 단 한 번도 하찮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여러 언어를 말하며 해외유학까지 해 본 사람이라고 해서 그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허투루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사람을 대할 때 나의 자세는  강강약약이다. 일을 시키는 입장이면서 그들을 존중하고 인간적으로 대했다면 그것이 잘못된 시작이었을까.


내가 여자라서 더 그렇다고도 생각했다. 현장에서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 인부들의 갑질은 상상초월이었다. 나 같은 초짜 인테리어 업체 사장만큼 쉬운 먹잇감이 어디 또 있을까. 모두들 돈을 더 뜯어낼 궁리만 하는 것을 알아챈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시세보다 더 비싸게 임금을 지불하면서도 이것이 나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닌 사회의 선순환 이리라 다스리면서...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귓등을 어지럽히는 저 불평들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의미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타협하지 않았고, 버릴 건 버리고 나와 맞는 결이 같은 사람들로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정직하고 정확하고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로. 물론, 아직까지 확신할 수 없다. 만, 이 세계 모두가 다 장사치&사기꾼 천지로 가득한 것만큼은 확실하다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나에게 잊지 못할 창업 초기 에피소드를 만들어준 사기꾼이 한 명 있었다. 지인소개로 만난 자칭 목수였다.


그런데 철거 후 현장 둘째 날 이 목수가 이른 아침 현장에 와서 변기가 철거된 자리 배관 구멍에 대고 변을 보았나 보다. 같은 날 필름 작업을 하는 인부가 전화를 해서 냄새 때문에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고 해서야 진상을 듣게 되었다. 부랴부랴 현장으로 달려가니 온 집안에 퍼진 냄새는 상상초월이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그 65세 목수에게 진위여부를 물었다. 그러나... 다른 인부들이 숨죽이고 응시하는 그 상황에서 '그렇소, 내가 이른 아침 급똥이 마려워 배관 구멍에 대고 똥을 누었소'라고 순순히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럼에도 그 날 저녁 추석 연휴가 시작되니 명절 잘 보내라고 인건비를 미리 결제해 주었더니 연휴 마지막 날 마무리 작업을 다 해 놓겠다던 그 목수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건비를 절반이니 받아 놓고 일을 하지 않은 셈이다. 지인을 통해 의사를 물어보니 계약서가 있으면 법적으로 하란 다는 답을 들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 용노동부는 노동자는 계약서가 있건 없건 구두상으로 진행된 일용직이라도 임금은 100% 받아낼 수 있지만 (하자가 발생해도 상관없이), 사업주는 이 임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민사소송을 해야만 한단다. 60만 원을 받아내기 위해 사업주는 500만 원을 들여 민사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온갖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노동자는 고용노동부에 민원접수만 해도 다 받아주는 게 법이란다. 현장에서 일하며 발생한 하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단다.


내게 어느 지인은 "사업이 번창할 거야"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사업 초기 첫 현장에서부터 누가 똥을 싸놓았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대운을 상징하는 거겠냐며 앞으로 잘될 거라며 걱정 말란다. 그 덕분에 웃어넘기며 또 하나가 잊혔다.


타일쟁이는 술을 마셨다. 현장에 소주와 막걸리를 들고 와 술을 마시며 타일을 붙였다. 나에게는 들키지 않으려 조심했던가 까마득히 몰랐다. 우리 직원이 나중에 얘기해서야 알았고, 클라이언트가 현장을 방문하였을 때 들켰다. 나중에 내가 그 사실에 대해 주의를 주었을 때는 다른 현장에서 다른 클라이언트에게 들킨 이후였다.


"현장에서 술 마시다 다치면 산재 적용도 안 되는 거 모르세요? 우 현장마다 다 보험 가입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다 다치면 커버가 안 되는 거 알고 있어요?"


라고 말해도 막무가내다.


고객 항의로 인해 주의를 주면 미안하다 말은 못 할 망정 오히려 더 큰소리를 떵떵 치면서 자신이 받을 일당만 생각하니 막일판 노동자의 이기심에 환멸을 느끼는 시간도 있었다.




5. 대학원 수업은 노가다을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


"정체되고 싶지 않았어요"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선택이었든 내가 어떤 생각을 떠올고 결정을 하였을 때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창업 준비로 한참 바쁜 와중에 대학원 진학을 시작한 이유를 요즘 실감한다. 그것은 경계를 넘나들며 정체되지 않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막일판에서 시달리 지치고 힘든 몸과 마음을 가지고 일주일에 두 번 학교로 달려갔다. (이제 다시 비대면 수업이지만) 그렇게 교수님들과 마주 앉아 수업을 하노라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할 정도로 편안해진다. 시 휴식이기도 하고, 머리를 식히며 학문을 계속할 수 있어 좋았다.


건축학 이론부터 경영 컨설팅까지 교수님들은 나의 상황을 이해하시고 그에 필요한 조언으로 가득한 맞춤형 수업을 진행해 주신다. 이는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귀한 시간이다. 더 많이 배우기 위한 이 아니라 사무실 운영에 도움이 되는 시간으로 대학원 수업의 목표를 정해 두었던 터라 현재 교수님들과의 수업은 과분할 정도로 값지다.


일주일에 두 번 조용한 대학원 캠퍼스를 걸어 들어가 약 세 시간 남짓 교수님들과 건축에 대해, 건축 경영에 대해 소통하고 나와 현장 노가다판으로 복귀하노라면 경계를 오가는 나의 일상에 생명력이 한층 강해지는 느낌이다.


아카데믹한 시간과 극한 체험 삶의 현장을 오가며 살다 보니  그 경계속에서 채워지는 긴장감은 긍정적인 효과다. 바쁜 현장으로 출발하기 전에 건축작가를 분석한 날림일지라도 리포트를 제출하고, 과제로 학술논문을 써 나가는 이 평범한 초보 노가다판 아줌마의 일상은 이렇듯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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