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혁명 [역대하 23:1-15]
(아달랴 통치 7년,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온 회중이 다윗의 언약을 확인합니다. 안식일에 온회중이 성전에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고 기쁨의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 왕위를 빼앗은 가짜 왕을 내쫓고 처벌하시는 분.
# 나에게 주시는 교훈은?
- 성경 본문에서 ‘여호야다가 용기를 내어, 언약을 세우매’
- ’ 온 회중이 하나님의 전에서 왕과 언약을 세우매 여호야다가 무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할지니 ‘
- ’ 이제 너희는 이와 같이 행하라’
- ’ 모든 백성은 여호와께서 지켜야 할 바를 지킬지며’
- *하나님 나라에서 스스로 왕이 되어 하나님의 통치를 훼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 *내가 신앙 공동체의 왕이어서도 안 되고, 우리 공동체에 가짜 왕이 득세하도록 내버려 둬서도 안 됩니다.
- *여호야다는 옳은 일을 목적하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지 않는 길을 모색했고 목숨을 걸고 실행했습니다.
- *변화는 거저 얻어지지 않습니다.
- *유다의 어둠이 짙었을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 용기’를 냈습니다.
- *한 사람의 용기가 모든 이의 용기를 불러냈습니다.
- *무지가 부른 맹목적 용기가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에서 나온 용기입니다.
- *언약을 좇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신앙 개혁이었음을 의미합니다.
- *개혁의 목적은 권력이 아니라 언약이어야 합니다.
- 위 본문의 내용들은 여호야다가 요아스를 옹립하며, 아달랴를 끌어내리는 내용이다.
- 쉽게 비교 사례를 들자면 역사적 사실기반으로 픽션을 가미한 사극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내용인 것이다.
-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반란이겠지만, 반대의 입장에서는 대의에 따른 정당한 순리이다.
- 바르지 않았던 것을.
- 되돌리는 것.
- 여호야다는 이러한 일들을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과 방법으로만 한 것이 아닌.
- 하나님의 ’ 언약’을 기반으로 행하였다.
- 즉, 자신의 언행의 선택과 결정.
- 그 모든 것의 중심은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 세상에서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이실 경우보다는.
- ’나‘ 또는 ’ 우리‘.
- ’ 집단’과 ‘공동체’, ‘회사‘와 ’ 교회‘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그 안에서 중심을 ‘하나님‘으로 잡고 나아가는 사람은.
- ’나‘ 조차도 마찬가지지만.
- 객관적으로 보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 학업을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가족을 책임지고, 가정을 부양하고, 노후를 위해서, 꿈을 위해서.
- ’나‘와 ’ 우리‘는 늘 쉽게 ’ 타협‘을 하고는 한다.
- ’ 주님’의 말씀으로 ‘나’와 ‘우리‘의 ‘영‘은 ’ 평온‘하고 ’ 은혜‘를 받지만.
- 지금 당장의 숨 쉬는 것, 먹는 것, 자는 것, 입는 것, 이동하는 것.
- 그 모든 것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 그 ’ 돈‘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데.
- ’ 돈’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고.
- ’ 돈‘을 우리에게 지급하는 ’ 주체’는 ‘하나님‘이 아닌 ’ 세상‘이라고 인지를 한다.
- 맞는 말이지만.
- 틀린 말이기도 하다.
- ’ 돈’ 뿐만이 아니라.
- ’ 관계‘.
- ’ 건강’.
- ’ 꿈‘ 등.
- 사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 채워주시고, 부어주시고, 축복하시는 그 모든 것들 중 하나인데.
- 모든 ’ 주권’이 ‘나‘와 ’ 우리‘의 능력과.
- ’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 ’ 하나님‘의 것임을.
- ’ 잊어버리는 망각의 존재가 인간’이다.
- ’ 운칠기삼‘이라고 하여.
- 꾸준히 잘 버는 사람이든.
- 어려웠으나 어느 순간 ‘때‘를 잘 만나서.
- 잘살게 되는 사람들 모두 ‘운’이고 ‘노력’의 결과라고 하지만.
- 역시 그 모든 것을 ‘주관’ 하시고, 하셨고, 하실 분은 분명 ‘하나님’ 이시다.
- 그렇지만 ’나‘와 ’ 우리’는 여태껏 또는 간간이 ‘스스로가 머리 되는 왕‘이라고 착각을 하고는 한다.
- 에덴동산에서 나와 땅을 일구고, 죽음에 이르게 된 과정.
- ‘아담‘과 ’ 하와‘의 가장 큰 실수.
- 그리고 지금까지도 수없이 반복해 오는 인간의 실수.
- ’ 교만’.
- ‘교회 공동체’에서도 사실 그렇다.
- ’ 어차피 아는 사람 별로 없어~’.
- ’ 저 사람 여기 세력 없어~‘
- 위와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 참으로 우습지 않나?
- 감히 누가 누굴 판단하고.
- 끼리끼리의 무리를 형성하고.
- ‘ 팀모임‘이든 ’ 조모임‘이든.
- 지난 팀에서부터 조금이라도 알고 지냈던 사람들.
- 같은 선교팀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
- 같은 제자훈련이나 다른 성경 아카데미 등.
- 같은 시공간에서 나눔을 했던 이들과만.
- 매번 옆에 앉고.
- 매번 그들과만 나눔을 하고.
- ‘ 나는 낯가림이 심해서 ‘, ’ 나는 숫기가 없어서’, ‘나는 초면에 불편해서 ‘라며.
- 자신만의 그룹을 이루고.
- 새로운 이들과.
- 태신자들.
- 그리고 오랜만에 ‘예배‘의 자리에 참여하고.
- ’ 공동체 모임’의 자리에 나온 이들에게.
- 거리감 두게 하는 그 모든 것들.
- 세상은 변한다.
- 사람도, 문화도, 분위기도 다 변한다.
- 그래도 최소한.
- 우리 ‘믿는 자’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 세상에서 치이고, 쓰러지고, 상처받고, 낙심한 모든 형제와 자매들이.
- ’ 용기’를 내어 다시 ’ 예배’의 자리와.
- ’ 교회 공동체‘를 찾아왔을 건데.
- 왜 ‘우리‘의 일부는.
- 그들을 ‘환영’ 하지 않을까?
- ‘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 세상’과는 조금이라도 달라야 하지 않을까?
- 세상에서 가지는 여러 시선과 잣대들.
- 왜 ’ 교회‘에서도 ’ 세상‘에서 처럼 똑같이.
- ’ 프레임‘을 씌워서.
- ’ 편 가르기‘, ’ 끼리끼리 집단‘을 형성하려 할까.
- ‘ 교회 공동체’는 그래도.
- ‘ 주님‘ 이신.
- ’ 예수님‘ 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나?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 이는 내 멍에는 쉽고.
-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태복음 11장 25~30절.
- ’나’는 ’ 모태신앙’이고.
- 어린 시절에는 ‘순복음‘ 교단의 개척교회에서.
- ’ 가족들‘과 함께 섬겼으며.
- 이후에는 여의도 ’ 모교‘에서 신앙생활을 해왔다.
- 그간 간간이.
- ’ 직장‘의 위치로 인해.
- 그 지역의 ‘ 지성전’ 교회에 출석하며 ‘공동체’ 생활을 해보기도 했고.
- 다른 교단인 ‘장로교‘의 ’ 지역 교회’를 섬기기도 했었는데.
- 그때 느낀 것들은.
- 사실 비참하다.
- 한마디로 요약하면.
- ’ 고인 물’, ‘흐르지 않아서 썩은 물’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렇다.
- 오랜 기간 초중고 또는 최소 몇 년 이상이라도 함께 했던 기존의 공동체가 있다.
- 그러한 공동체에 새로운 사람이 온다면.
- 물론 어느 정도, 대략 1~3개월여는 지켜보며, 관찰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 있다는 것은 알지만.
- 시간이 흘러도 ’ 기존의 고인 물’들 사이에.
- 새로운 새 신자는 ‘이방인’인 경우가 여전히 있다.
- 각 교회 공동체의 ‘성격‘이다 라거나, ’ 사람‘마다 다른 거 아니냐?.
- 할 수도 있겠지만, ’ 순복음’의 ‘기존의 지성전‘에 출석하다가 ’ 여의도 모교’로 갔을 때와는 다르게
- 느껴졌던 부분과 ‘지역 교회‘에 갔을 때와 ’ 순복음‘의 ’ 새로운 지성전’에 갔을 때에는
- 너무 극렬히 차이점을 느꼈었기에.
- 그것이 ‘교단‘을 떠나서.
- 내가 느꼈다면, 다른 사람 누군가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에.
- 여러 교회에서는 자성의 목소리와 함께 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물론 모든 교회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 하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서.
- 누군가가 나에게 교회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서.
- 출석할만한 교회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나는 늘.
- 각 지역의 ‘초대형’ 교회로 출석하여 성도 등록을 하고 공동체에 나가기를 권면해 왔다.
- ’ 여의도 순복음교회’, ’ 온누리 교회‘, ’ 사랑의 교회‘, ’ 삼일교회‘ 등.
- 무조건 큰 대형 교회로 말이다.
- 교회에서 나눔의 시간은 사실 제한적이다.
- 나눔 안에서 그 형제에 대해.
- 그 자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 어렵고 ‘, ’ 이상하고’, ‘ 부담스러운 ‘ 사람이 된다.
- ’ 교만’과 더불어 교회에 팽배한 ‘ 편견‘.
- ’ 나‘는 세상에서 정말 좋은 사람이다.
- ’ 나’와 맞지 않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 ’ 나’를 아는 사람들은 ’ 나‘를 정말 좋아한다.
- 세상에서는 그 사람의 ’ 능력’ 또는 ‘ 그 사람 자체‘로 바라봐준다.
- 교회는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 ’ 사람’ 그 자체가 아닌 ‘ 출석률‘.
- 모임에서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 성경적 발언’들을 기준으로 본다.
- 사실 ‘ 신앙생활‘이 아닌 단순 ‘종교 활동’을 하는 자라도.
- 최소 6개월이면 누구나 충분히 작정하고 마음먹으면.
- ’ 거룩한 말’, ‘ 성경 본문 인용‘, ’ 아멘’, ’ 주님~’, ’ 할렐루야~‘, ‘ 믿습니다~‘라고.
- 그 누가 못하나?.
- ’ 본질‘.
- 나는 교회에서 사람의 ’ 본질‘을 보려 노력한다.
- ’ 종교 활동’이든 ’ 신앙생활‘이든.
- 사람의 ‘ 인성’과 ’ 인격’은 ‘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에게 합당하기에 빚어주신 모습이므로.
- 교회에 출석하는 자의 ‘ 목적‘과 ’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 ’ 변화‘ 할 수 있는 사람인지.
- ’ 다름’을 받아 들일수 있는 사람인지.
- 순진하지는 않으나, ’ 순수’한 사람인지를 바라본다.
- 이성을 만나러 왔든.
- 추수꾼이라서 찾아왔든.
- 모든 만물과 시공간의 ’ 주권’을 가지신 ‘주인‘ 이자 ’ 머리’ 되시는 ’ 하나님’께서
- 그분의 때에 알아서 각 사람들 하나하나 빚으시고.
- 다듬으시고.
- 만들어 가심을 알기에.
- ’나‘는 적어도 ’ 매번‘이든 ‘ 가끔’, ‘ 모처럼‘, ’ 오랜만에‘, ’ 처음‘, ‘ 어쩌다가’ 온 지체들에게.
- 말 한마디라도 더 건넨다.
- 기존의 나눔을 하던 이들이 그들끼리 나누느라 정신없을 때.
-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알게 모르게.
-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바라보고 다가간다.
- 그래서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이렇게 얘기하며 놀라고는 한다.
- MBTI.
- ‘E’ 성향인 줄 알았다고.
- …. 난 사실 ’ 극 I’ 성향이다.
- 내가 아닌 누군가가 그들을 챙겨 주었다면.
- 따뜻한 말 한마디 까지는 아니더라도.
- 반갑게 인사라도 나누어 주었다면.
- 굳이?
- 내가 안 나서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이제와 평신도인 내가 예전처럼 ’ 구역장’ 도, ‘ 총무단’ 도, ‘ 팀장’ 도 아니니까.
- 내가 해야 할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말이다.
- 하지만 ‘ 나’ 도 예전의 여러 교회에서 느꼈던 불편한 것들을.
- 또 다른 누군가 그것을 동일하게 느낌으로.
- 어렵게 찾은 예배의 자리에서 시험에 들어.
- 예배의 자리와 멀어지는 것이 눈에 밟히기에.
- 누군가 뒤에서 ‘ 오지랖‘이라고 떠들든 말든 다가갔던 것이다.
- 그들이 뒤에서 떠들면 뭐 어쩔 것인가.
- ‘ 주님’께서 이렇게 바라보는 ‘ 시선‘과 ’ 마음‘을 내게 주신 것을.
- 주변에서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없다.
- 나의 이러한 언행들로.
- 한 영혼이라도 조금의 위안과 위로가 되며.
- 그가 ’ 교회 공동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지 않게 되어.
- ’ 예배의 자리’를 떠나지 않게 되어 ’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 그러한 ‘ 열매’를 내가 볼 일이 있을지 없을지는 ‘ 나의 영역‘이 아닌 ’ 주님의 영역’ 이기에.
- 그저 주님께서 보시기에 흡족하셨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만족한다.
- 단톡에 매일 같이 극동방송에서 나오는 말씀들을 나누는 것과.
- 제자훈련 단톡에 묵상들을 공유하는 이유 또한 비슷하다.
- 어차피 올려도 40여 명, 10여 명 되는 지체들 중에 한 두 명은 제대로 읽겠으나.
- 대부분의 지체들은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 그래도 단 한 명의 지체라도.
- 나의 행동으로 인해 ’ 은혜‘를 누리고.
- ‘ 묵상’의 시간을 가지게 하며.
- 그에게도 이러한 ’ 도전‘을 하고자 하는 결단의 ‘ 열매’가 열린다면.
-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 주님‘ 보시기에 이 또한.
- ‘ 작은 선교‘의 하나가 아닐까?
- 삶에서 행하는 ‘ 작은 선교’.
-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이 ‘ 말씀‘ 관련 영상이든 사진이든 ‘ 묵상‘이든 올리면.
- 무조건 ’ 하트’ 또는 ‘ 따봉 굿굿‘을 날린다.
- 그들이 ‘ 자기 자랑’을 위해 올리든.
- ‘ 순수한 마음‘으로 올리든.
- 그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 ’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지 않을까 해서이다.
- 무엇을 작성하던, 퍼오던,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 가끔 피곤하고 귀찮기도 하지만 그래도 좋다.
- 삶에서 행하는 ‘ 작은 선교‘ 이니까.
- ’ 주님’이 이러한 ‘ 시선’과 ‘ 마음‘을 나에게는 주셨으니까.
- 사지 멀쩡하고 정신 건강한 상태에서 할 수 있게 해 주셨으니까.
- 그래서 그저 ’ 감사함‘으로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