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책 발견 [역대하 34:14-33]
(신전을 수리하던 중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율법책으로 인해 영적 각성이 일어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을 다짐하는 언약 체결식이 거행됩니다.)
#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 하나님은 온유하고 자비하신 분.
# 나에게 주시는 교훈은?
- 성경 본문에서 ‘ 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헌금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가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 ’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그 책을, 주매‘
- ’ 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아뢰어, 왕 앞에서 그것을 읽으매’
- ’ 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
- ’ 왕이, 이르되’
- ’ 너희는 가서,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준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하니라’
- ’ 이에 힐기야와 왕이 보낸 사람들이 여선지자 홀다에게로 나아가니’
- ’ 홀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
-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재앙을 내리되,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 ’ 이는 이 백성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그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의 노여움을 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여움을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니라 하라 하셨느니라 ‘
- ’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전하라,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 ’ 내가 이곳과 그 주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약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손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 ’ 내가 이곳과 그 주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
- ’ 왕이 사람을 보내어’
- ’ 유다 모든 사람과, 모든 백성이 노소를 막론하고 다 함께 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주고 ‘
- ’ 왕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 ’ 다 여기에 참여하게 하매 예루살렘 주민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니라 ‘
- ’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위 성경 본문을 다시 간단히 요약하면.
- 성전 수리 -> 모세의 율법책 발견 -> 요시야 왕 ‘ 율법의 말씀’ 들음.
- 요시야 왕은 ‘ 애통하며 옷을 찢음’
- 여선지자 홀다에게 사람을 보내 하나님의 의중을 물음.
- 말씀 가운데에 뉘우치고 행하는 사람은 용서한다는 것을 깨달음.
- 그래서 백성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며 언약을 맺으며 섬기게 함.
- *깊고 넓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변혁을 낳는 말씀의 능력을 힘입으려면 말씀을 더 힘써 배워야 한다.
- *내가 살게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다른 사람도 살려야 한다.
-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았다면, 다른 사람도 나처럼 되기를 바라며 구원의 길로 안내해야 마땅하다.
- 금일 묵상을 하며 크게 3가지를 느꼈다.
- 배우고 적용하여 실천한다.
- 그중에서도 특히 ‘ 배움’
- 나는 최근까지 ‘ 통성 방언 기도’에 대한 갈급함이 커졌어서.
- 금요 예배만큼은 ’ 모교‘에서의 금요성령대망회 예배를 드리며 통성 방언 기도를 크게 하고,
- 바로 ’ 본교‘로 이동하여 금요기도회 예배 드리면서 통성 방언 기도를 낮게 하며 마무리를 하고 있다.
- 다행히 ‘ 모교‘와 ’ 본교’ 사이의 이동 거리가 멀지 않으며 15분여.
- 이동 중에도 모바일로 ‘ 본교‘의 말씀과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은.
- 예배 시작 시간의 간격이 커서이다.
- 굳이 이러한 시간적 물리적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유는.
- 집에서 드리는 기도는 아무래도 혹시 모를 층간 소음이라던가 등의 이유로 낮게는 가능해도 크게는 힘들기 때문이다.
- 또한 누군가는 신비적 체험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으나,
- 성령의 은사로 보는 나는 예배당(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의 자리에서의 그 놀라우신 성령의 만져주심을 알기에 더욱이 간절함으로 하고 있다.
- 그렇다면.
- 세 가지 카테고리에서 ’ 배움‘이라는 측면에서.
- ‘ 기도’와 더불어.
- ’ 말씀‘에 대해서도 나눔을 하자면.
- 성경 말씀 묵상을 혼자 하는 것 또한 주님과의 친밀함으로 인한 은혜가 크지만.
- 제대로 참된 스승님과 같은 ’ 목사님‘의 설교 말씀 가운데에 임하는 은혜도 매우 크다.
- 전체적으로 ’ 중도‘의 성향인 나에게는 ’ 보수‘와 ’ 진보‘ 그리고 ’ 중도’.
- 그 모든 것에 대한 기준은 명확하다.
- 잘했으면 잘했다고 얘기할 줄 알아야 하며.
- 못했으면 못했다고 얘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누군가는 기회주의 아니냐 라거나 기준이 모호한 것이 아니냐라고 할 수 있겠으나.
- 세상, 신앙.
- 그 무엇이든 간에 꼭 이분법으로 나누어 볼 필요가 있을까?
- 그래서 나름 두 교단의 교회를 섬기는 입장이 되어버린 셈인데.
- 이 또한 누군가는 예배 / 교회 / 말씀 쇼핑이라면서 비판적으로 보겠으나 (나 또한 예전에는 그러한 시각이었다)
- 지금은 양쪽의 장단점을 겪고, 습득하며 체화하는 과정이라 생각하기에.
- 나 스스로의 신앙적 정체성과 방향성에 큰 영향을 받는 중이라서.
- 이러한 길로 인도하신 성령님에 순종하는 중인데.
- 개인적으로 너무 만족하고 있다.
- 핵심은 ‘ 말씀‘ 가운데에 내가 얼마나 중심을 제대로 잡는가 아닌가?
- 내가 아닌 ’ 주님’이 머리이시고 주권자이시며 왕이심을 알고 있고.
- 주님 보시기에 미쁘다 싶은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닌가 싶다.
- ’ 본교‘에 출석을 하며 오랜 기간 가나안 성도였던 나는 많은 회복의 시간들이 있었고.
- 스스로 느끼기에도 많이 회복이 되어 지금은 봉사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받았다.
- 현재 의료 선교 및 노숙인 분들 관련 사역에 동참하고자 다리 건너 의사 전달을 한 상태이다.
- 아직 연락이 없는 상황이나 주님의 때에 맞춰 바쁘신 사역들 가운데의 담당자분들의 연락이 오겠지 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 그리고 제일 중요한 요점은 이것이다.
- ’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다.
- 예전에 ’ 모교‘에서 열심히 청년부 임원 등을 하며 매우 뜨거웠던 시절에 가장 좋았던 것은.
- 매주 화요일에 교구장 목사님께서 진행하셨던 교구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로이 참여 가능했던 교구 자체의 ’ 화요기도모임’ 시간과.
- 총무단 및 구역장 / 부구역장을 대상으로 주일 예배 2시 30분 이전인 오전 10시경?
- 시작하는 GBS 강의 시간이었다.
- 위와 같은 시간들을 통해 목사님께 성경 본문 말씀을 바탕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보지 못했던 부분을 알 수 있었으며,
- 목사님 포함해서 함께 성경 말씀을 훈련받았던 지체들의 책임감과 간절함이 있었는데.
- 분명한 목적의식과 소명을 가지고 함께한 이들과의 나눔을 통해서도.
- 주님의 나라를 향한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 샘 솟는 시간들이 정말 좋았다.
- 한 계단, 두 계단 나아가며 한 단계, 두 단계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그러한 시간들.
- 그때의 좋은 기억을 바탕으로 장로교단인 ’ 본교’에 출석을 하면서.
- ’ 제자훈련’이라는 장로교단에 대한 부러운 장점의 시간들에 도전할 수 있었다.
- ‘ 모교‘ 또한 ’ 말씀’이 기본이기는 하지만 ’ 기도‘가 더 뜨거운 곳이라는 생각이다.
- ‘ 본교’는 ‘ 기도’도 기본이지만 ’ 말씀‘이 더 확실한 곳이라는 생각이다.
- 물론 ‘ 말씀‘과 ‘ 기도‘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두 중요하다.
- 그래서 ‘ 제자훈련 훈련반’을 1년 가까이하고 있는데,
- 목표로 가졌던 내년의 또 다른 1년간의 ‘ 제자훈련 사역반‘까지 이수하면.
- 장로교단에 출석하는 평신도로서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생각하려 했는데.
- 이러한 과정들의 만져주심 가운데의 나의 생각이 또 많이 변화가 되며,
- 또 다른 갈급함이 생겨서.
- 총신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오직 초교파인 연세대 신학과만 생각하던 나는.
- 총신대의 조직신학과 목회신학 수강 신청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 훗날 목회 또는 선교 등의 길을 가게 될지 안될지는 몰라도.
- 연세대 신학 대학원을 나와서 독립교단 카이캄을 생각했는데
- 이 또한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져서
- 연세대든 총신대든 똑같이 ‘ 정도’의 길을 가는 곳이지만.
- ‘ 초교파’에서의 가르침은 많은 영상들과 신앙 서적들로 대체하고,
- ‘ 개혁주의’에서의 보수적인 가르침을 받고 싶은 생각으로 확립이 되었다.
- 그렇다고 나의 중도적인 성향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 꼭 나중에 목회나 선교가 아닌 보내거나 후원하는 평신도의 삶을 계속 살아간다 해도
- 신학을 개인적으로 공부를 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 확실한 기준으로 스스로가 바로 서있어야
- 스스로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우상숭배를 하지 않지 않을까?
- 또한 이러한 경우에 대한 대처도 마찬가지다.
- 어떠한 것이냐면
- 예전에 같이 활동하던 타 구역장이 있었다.
- 그는 내가 섬겼던 국내 선교 팀장이기도 했는데.
- 그 또한 그때의 나처럼 갈급함 가운데에 주변 리더들이나 목회자 분들께.
- 성경적 퀘스천을 건네면 리더들 또한 그 정도의 깊이 있는 신학에 대해 모르니 막연히 ’ 기도하자’라는 답변.
- 바쁘신 사역가운데의 목사님들은 ‘ 기도하자’ 또는 다음에 얘기해요 라는 상황.
- 시간이 지나 그의 근황은 실망감 등을 포함해서.
- 타 사역을 하는 선교팀으로 들어갔고 이후에는
- ’ 신천지‘ 였다.
- A에 대해 확실한 B라는 정답지를 알려주는 그곳.
- 그렇다고 그의 선택을 뭐라 할 수는 없다.
- 다만 그렇게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고 사역하며 나아갔던 리더 그룹의 그가.
- 여러 광야의 시간 가운데에 결국 사막의 진흙 늪에 빠졌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 이런 시간들이 온다. ’ 갈급함‘
- 그중 성경 말씀에 대한 ‘ 갈급함’.
- 우리는 흔히 리더에 대한 기본 기대치가 있기에 물어본다.
- 그러나 직분이 그 사람의 신앙 상태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며,
- 직분이 그 사람의 신학적 깊이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기에.
- 이러한 상황이 생기면 종종 실망을 가지기도 하기도 하지만,
- 진취적으로 나아가서 각 교회의 성경 아카데미 등을 통해 그 ’ 갈급함‘을 해결 하기도 하고,
- 유튜브를 통해 타 교회의 목사님들의 설교 말씀들을 더 많이 듣지만
- 설교 말씀 가운데의 가르침의 양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이 시기에
- 채워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신학을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 성경을 더 잘 알아가는 것, 하나님에 대해 더 잘 알아가는 것.
- 막연히 신학이라 하여 무조건적인 목회의 길을 가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 왜 누가 그리 겁을 줄까?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와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 스스로 독학하며 잘못된 신앙관을 가질 바에는,
- 좋은 학자에게 배움을 받는 게 뭐가 문제인가?
- 초중고등학교와 학원,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지 않고 스스로 독서와 자습을 하며 살아도 어느 정도의 지식은 쌓아가며,
-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 없다. (학위로 취업의 어려움 관련 제외)
- 그런데도 정규 과정을 이수하려는 이유는? 말 안 해도 다 알지 않나?
- 나이와 직업, 국적 불문 하고자 하면 누구나 하면 된다.
- 용돈과 생활비,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 줄여가며 결단하면 된다.
- 그렇다고 나는 신학 배우니까 신학 할 거니까, 나는 신학 배웠으니까 자만할 필요도 없다.
- 배우든 배우지 않든 신앙 생활 하는데에 전혀 문제없다.
-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 겸손해야 한다.
- 그래도 최소한 ‘ 성경적 가르침‘에 목이 말라 ‘ 신천지’와 같은 곳에 빠지지 말자.
- ’ 정도‘의 길을 걷는 제대로 된 ‘ 교단’과 ’ 교회’ 그리고 관련 신학교 등.
- 올바른 선택지는 충분히 많다.
- 20대 후반~30대 초반에는 리더들 및 구역원들과 결혼 얘기, 이성 얘기, 사회 얘기, 직장 얘기 등 나누면 재미있었는데.
- 지금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 교회에 당연히 예배드리러 가지만.
- 추가적으로 시간적 물리적 할애를 해서 참여하는 나눔 시간에 그러한 얘기를 나누는 건 솔직히 시간도 아깝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그런 잡담과 같은 얘기를 듣는 시간조차 너무 에너지가 떨어지고 기 빨린다고 해야 하나?
- 교회에서의 나눔 시간 가운데에 성경적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 지체들의 간증을 듣기도 시간이 빠듯한데.
-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랑하는 시간도 필요한데.
- 그래서 더 갈급함이 생겨나간 건 아닐까 싶다.
- 삶의 모든 것이기에 위의 얘기들을 나눈다는 게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다.
- 그렇지만 주객전도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 교회는 물론 커뮤니티가 맞지만.
- 교회에 우리는 왜 나가는가.
- 교회에서 우리는 왜 나눔을 하는가.
- 교회의 나눔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가.
- 교회에 출석하는 우리들은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 하나님의 동행하심으로
- 영적 성장과 성숙을 기대하며
-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 믿음의 동역자들이
- 내 주변에 많이 허락해 주시기를
- 오늘도 바라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