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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 25.09.11.목.

고통의 날을 피할 오늘의 선택 [스바냐 1:14-2:3]

by 김모찌

(하나님의 진노는 막을 수 없고, 피할 수 없습니다. ‘공의‘와

’겸손‘을 구하며 ’하나님’을 찾는 것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 심판하실 ‘여호와의 날‘을 준비하시는 분.

- 우상숭배와 폭력으로 하나님을 버린 모든 자를 잠잠치 않으시며 불로 멸하시는 분.

-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백성,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를 모르는‘ 자들에게 진노를 쏟으시는 분.

- 하나님께서 진노를 쏟기 전에 여호와를 찾아 ‘규례’를 지키고 ‘공의‘를 실천, ‘겸손‘히 뜻을 묻고 의지하며 삶을 돌이키는 방법으로 화를 피할 길부터 알려 주시는 분.

- ‘겸손하게 하나님과 함께하며 오직 정의를 행하는‘ 삶을 원하시는 분.



# 나에게 주시는 교훈은?


-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수없이 되낸다. ‘공의‘란 ’공평’과 ‘정의’를 합친 말인데 국적, 나이, 성별, 직업과 상관없이 죄를 지어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 우리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구원을 받았다. 물론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도 있다.


- 구원을 받지 못한 이들만 공의의 심판을 받을까?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하는 자들과 범죄 한 자들을 심판하신다고 하셨다.


- 흔히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대로 우리 믿는 자들은 한번 구원받았으면 그걸로 끝인 걸까? 그들이 성경 해석을 자의적으로 어떻게 풀어서 그리 주장하는지 모르겠으나 가장 쉬운 예로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와 더 크게는 선택받은 민족이었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올리면 쉽지 않을까 싶다.


- 구원을 받지 못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중요하다. 심판의 때이든 아니든 한 영혼이 예수님을 알게 되어 믿음으로 거듭나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게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러한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은 과연 공의에서 자유로울까?


- 세상에서는 성공하고자 한다면 생각과 말로만 하지 말고 행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매번 다이어트한다고 말은 하면서 넷플릭스 보면서 치킨 뜯고 있는 건 뭐지?


- 신앙생활의 핵심은 성경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 적절한 예시를 들자면 대부분의 n 연차 부부들은 의리로 산다고들 한다. 이는 여러 룰 가운데 하나인데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덕적 가치가 있으며 이러한 관계 속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그 죄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


- 우리는 흔히들 주님의 신부라는 표현을 한다. 이는 부부의 관계를 나타낸다.


- 연인 사이에 이별을 하는 것과 부부 사이에 이별을 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사이와 책임을 지는 사이로 나뉜다. (데이트 폭력과 사별의 경우는 제외)


- 헤어짐을 결심한 부부는 협의 이혼의 경우 ‘이혼 숙려기간‘이라는 것을 갖는다고 한다.


- 진노의 심판인 ‘여호와의 날’ 이전에 공의의 하나님께서 화를 피하는 길을 알려 주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십자가 앞에서의 회개, 자기 성찰과 반성, 나아감과 성장, 이웃에 대한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과 베풂.


- ’원래’ 죄인이었으니까? 심판을 받는 게 당연하다?


- ’원래‘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까 괜찮다? 다 용서하실 거다?


- 무슨 근거로 ‘원래‘라는 단어에 숨어서 당연하다고, 괜찮을 거라고 장담을 할 수가 있지?


- 스스로가 ‘공의’에 대해서,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며 어리석다는 것을 내보이는 게 아닐까?


-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늘 언제나 그 한없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고 누리는 게 맞지만 ‘밥상머리 예절’이 없으면 어릴 때 어른들께 혼나듯이 ’공의’의 하나님께 혼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틀리거나 잘못하고 실수한 것이 있으면 깨닫고 고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야 한다.


- 이러한 것들이 우리가 늘 얘기하는 ’열매’의 하나가 아닌가?


- 성경 말씀 잘 안다고, 선교 여러 차례나가봤다고 그게 ‘열매‘의 전부는 아니다.


- 나의 부족하고 연약하며 넘어지고 실수한 그 모든 부분들을 주님 안에서 치유하고 회복하여 단단해지고 앞으로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같은 자녀이며 제자가 되어 간다면 이 또한 ‘열매‘의 하나로써 얼마나 주님께서 기뻐하실까?


- 세계의 역사, 서구 사회의 성공, 그리고 대한민국의 성공은 기독교,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성장해왔다.


- 그러하기에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도 ’하나님’의 프로세스는 다들 알고 있다. 그들은 항상 얘기한다 ‘성공하고 싶다?‘ 그러면 ‘행동하라‘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얘기해도 당신들은 안 할 거라는 걸 안다고 얘기한다.


- 믿는 우리들 중 일부는 그동안의 지식과 경험으로 아는 게 전부이면서 ‘원래‘라는 핑계로 또는 행동을 강조하는 것은 행위(율법)주의자들인 ’바리새인’들과 같은 거 아니냐며 합리화 시키며 자기주장을 하고는 하는데 묻고 싶다.


- 그럼 ’교회 출석 예배’, ‘선교‘, ’전도’, ‘기도‘, ’성경 말씀 묵상’, ‘제자훈련‘, ’신학’ 전부 행동이며 행위인데 모든 크리스천들이 ‘바리새인‘인가?


- 예수님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우리는, 멋대가리 없으니까 제발 합리화와 핑계 좀 그만 대고, 어떠한 상황에도 뜻을 굳히지 말고 행동력 있는 실천을 바탕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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