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과 건물에 들어오기 전에는 늘 심호흡을 했다. 지금보다 빡빡했던 과거의 선후배 문화 속에서 가장 기본적인 건 인사였다. 언제 어디서든 선배를 마주치면 연극영화과 특유의 인사를 우렁차게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늘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예술대학 건물에 들어서면 무작정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혹시나 얼굴을 모르는 선배를 지나치는 일이 없도록 그 편이 더 나았다. 가끔은 때로 사람이 안 다니는 골목으로 숨어 다니기도 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분위기였다. 어쩌면 내가 선배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예술대학 건물을 들어설 때마다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후배들에게 인사를 받는 일이 그렇게나 부담스러운 일인 줄 몰랐다. 권위적인 것보다 자유로움과 개인에 대한 존중을 추구하는 나에게 누군가의 깍듯한 인사는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냥 가볍게 넘기고 지나가도 될 일이었는데 오히려 나의 이런 태도가 후배들에게 더 눈치를 주게 된다는 걸 몰랐다.
공연 연습을 진행하면서도 선배로서의 권위를 앞세우거나 다른 대우를 바라지 않았다. 처음부터 우리는 공연에 참여한 동료였을 뿐이고 그들과 다른 점은 나에겐 졸업 작품이었다는 사실이다. 소품을 챙겨야 하거나 연습 시간을 배정하거나 무대를 준비할 때에도 늘 같은 마음이었다. 어느 날 연습이 끝나고 교수님께서 따로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는 뜻밖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선후배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는 건 분명히 필요하다. 다만, 선배로서의 역할과 후배로서의 역할은 구분되어 있다. 솔선수범하는 태도는 좋지만 그게 반복되면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후배들이 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렴.”
적잖이 놀랐고 당황했다. 배려라고 생각했던 나의 말과 행동들이 보이지 않는 룰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교수님이 어떤 걸 요청했을 때 군말 없이 내가 먼저 일어서곤 했는데 어떤 날에는 나만 움직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교수님께서는 연출가이자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님이셨다. 그런 상황 속에서 규율을 바로 잡는 건 선배의 몫이라는 말을 둘러 알려주셨던 것이다. 우리들의 관계는 평화로웠지만 교수님 눈에는 위태로워 보인다 하셨다.
지금까지 생각한 가치관이 흔들리는 말이었다. 갑자기 모든 게 달라질 수는 없었지만 그 말을 염두에 두려고 했다. 이 곳도 엄연히 하나의 사회이고 암묵적인 룰이 있다. 내가 그걸 배려라는 이유로 무너트릴 권한은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늘 혼자 해결하려 했다. 막내로서 후배로서 보낸 시간들이 익숙해 있었든지, 혹은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성향 탓이든지,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마땅히 내가 하는 것에 대해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회피였다. 납득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발전적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선배라는 역할 자체에 낙인을 찍고 도망치고 있었다. 선후배 문화 자체가 권위적인 것.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부터 스스로를 선배라 여기지 못하니 우리의 관계는 위태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친구도 동료도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 누군가에게는 말할 수 없는 부담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