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무상 Feb 18. 2021

25. "애들 연습실로 모이라고 해"


다시 떠올려봐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한다.


연습은 평소처럼 진행되었다. 아주 특별할 것 없이 뻔하게. 같은 장면과 같은 대사는 몇 번이나 반복되었고 그렇게 겨우 내 장면이 끝났다. 그리고 연습실 앞에 앉아 상대 팀 연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하고 뻔한 시간이 흘러갔다. 애꿎은 대본만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정적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는지 나와 같이 연기를 지켜보던 후배 녀석 둘이서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나도 지루한 참이었으니까. 같이 연습실을 나가서 재미난 이야기나 공유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배운 연습실의 룰에 어긋났다. 상대 팀이 연기를 하고 있는 동안 자리를 비우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 내 연습 장면을 그대로 지켜봐 준 사람들에겐 더더욱. 어떻게 보면 그 시간에 개인 정비 또는 연습을 하는 게 더 효율적인 시간이라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야.




선배들이 앞에서 감정 연기를 하고 있지만 매 순간 집중해서 지켜볼 수는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연습실에서 나가 탈의실에서 대기하라는 말을 전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 뱉은 말이었다. 지난번 교수님께서 선배의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신 뒤로 이런 상황 때마다 괜히 눈치를 보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여기에서 가장 선배는 내가 맞았으니까. 연습실을 떠나라는 나의 말은 나름의 배려이자 경고였다.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연습에 방해될까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들은 그렇게 연습실을 떠났고 연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연습은 길어졌다. 감정적으로 힘든 장면들이 반복되었다. 마냥 지켜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때에 따라 대사를 대신 맞춰주던가 혹은 동선을 비교하며 불려 나가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탈의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미간은 찌푸려졌고 교수님의 표정은 오히려 평온했다. 잠깐의 휴식이 주어졌다. 다른 후배가 재빠르게 탈의실에 가서 후배들에게 주의를 주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잠잠해졌고 고요한 적막 속 내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흥분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분노인지 원망인지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머리가 아팠고 몸이 간지러웠다. 존중과 배려의 태도에서 돌아온 건 무례함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와 후배. 이해할 수 없었던 선배들의 강압적인 태도와 언행도 이러한 감정에서 출발했던 것일까. 원망하고 무서워했던 그 모습들이 나에게 겹쳐지는 것 같아 겁부터 났다.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연습은 끝이 났다. 오늘의 일은 마무리가 반드시 필요했다.


아마 내 표정은 귀찮은 듯 애써 무심한 척하는 모습이었겠지만 내 얼굴의 모든 주름은 조금씩 씰룩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탈의실에 들어가기 전, 오랜만에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후배들은 없었다. 맥이 풀리기보다는 몸이 덜덜 떨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후배들은 학교 근처에서 동기 모임 자리에 모여있었다. 연습시간이 길어져 먼저 내려갔다는 말과 함께 시끌벅적한 소리는 휴대폰 너머로 들렸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후배들이 내 표정을 살폈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지만 잘 되지 않았다. 겨우 숨을 고르고 말했다.


“애들 연습실로 모이라고 해.”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후배들을 집합시켰다.



25. "애들 연습실로 모이라고 해" fin.

이전 24화 24. 후배의 역할 선배의 역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