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이 다가올수록 점점 말라갔다. 연습이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감정은 점점 고조되었다.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작품에서 캐릭터의 감정이 결말에 다다르면서 터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제까지 쌓아 온 서사를 터뜨려야 했다. 후회와 미안함, 죄책감과 분노, 실의와 놀라움은 소리 없는 눈물로 표현되었다. 항상 진이 빠진 상태로 연습을 마쳤다.
그제야 왜 그렇게 선배들이 연습이 끝나면 술을 한 잔 하는 줄 알겠더라. 연습 내내 눈물을 쏟고 나면 알게 모르게 그 감정들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알 수 없는 우울감이 머리를 가득 메웠다. 극 중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무대를 한 바퀴 돌 때마다 마치 정말로 상을 당한 사람처럼 상실감에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일부러 술자리를 많이 가졌다. 마음을 털어내야 했다. 극과 현실을 구별하는 매개가 술 한 잔이었다.
언젠가 교수님과 작업한 단편 영화에서 우리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괴롭힘을 당하던 주인공이 강한 충격으로 모든 기억을 잊고 살다 어떠한 계기로 각성하게 되어 가해자들을 찾아 나름의 복수를 하는 이야기였다. 가해자의 우두머리로 출연을 했는데 자신의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해 상대에게 트라우마를 선사하는 장면이 있었다. 우리는 더 좋은 장면을 만들기 위해 깊은 이야기를 나눴고 나도 잊고 있던 나의 트라우마들이 떠올랐다.
잊었다면 잊었고 외면하고 묻어두고 살던 그 기억을 끄집어내 장면을 완성했다. 캐릭터가 내뱉는 대사의 감정에 잘 묻어나는 기억이었다. 괴로웠다. 연출자는 내게서 그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희미해지기 전에 카메라 앞에서 대사를 뱉게 했다. 그렇게 오케이가 났지만 나는 오케이가 아니었다. 그 기억은 내게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수년을 잊은 채 살았던 그 기억은 며칠 동안이나 나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한 줄의 대사를 위한 대가로는 가혹했다.
캐릭터에 동화되어 엄청난 업적을 남긴 대배우들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를 잃어버려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하게 연기와 나를 구분할 줄 알아야 했다. 스위치를 켜고 끄는 것처럼 간단한 조작법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매번 휘둘릴 수는 없었다. 연극을 하면서 나름의 방법을 찾은 건 특정한 대사 한 줄에 모든 필요한 감정을 다 담아내는 것이었다.
지금도 무대 위 기억들을 떠올릴 때 그 대사 한 줄들 만큼은 기억이 난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떠올리면 그때의 그 감정들이 희미하게나마 떠오른다. 이제는 눈물이 나거나 하는 감정의 동요는 적지만 복잡한 감정들과 함께 묘한 떨림만은 느껴진다. 무대에 오르기 전 몇 번이나 되뇌며 나는 캐릭터로 변신했다. 그건 나의 주문이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암전이 되는 순간 나의 마법은 풀렸다. 지금의 내 마음은 그리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