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몇 편의 연극과 영화 이름이 내 옆에 프로필이 되었다. 다정하고 소심하지만 작가라는 꿈을 향해 나아가던 ‘우리’는 음악이라는 꿈을 꾸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하는 청춘 ‘지우’가 되었다. 죽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자책하던 소설가 ‘준모’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서 사람 냄새를 풍기고 싶어 하는 마스터 ‘무영’이 되었다.
우연한 기회로 작품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카메라 앞보다는 무대가 더 편하고 좋았다. 커다란 스크린에 줌을 잔뜩 당긴 내 모습을 보는 건 고통스러웠다. 연기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내 얼굴의 단점들만 보였다. 그렇다 보니 늘 카메라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아닌 척하려 해도 티가 났다. 감독은 속여도 나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아닌 척 앞에 섰다.
두려웠다. 언젠가 이 모든 진실이 밝혀질까 무서웠다. 카메라 앞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이 아무도 속이지 못하는 순간, 나는 어떠한 변명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연기에 재능 없음을 스스로 마주하는 장면이 올까 두려웠다. 지금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남을까 봐. 그렇게 작품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나의 혼란스러움은 커져만 갔다.
과연 내가 언제까지 연기를 할 수 있을까, 이건 연기라는 행위 자체의 의미와 내 자신에게 연기하는 내 모습을 동시에 의미했다. 과연 내 직업이 될 수 있을까, 당당하게 저는 배우입니다, 라는 말을 내 입 밖에 낼 수 있을까. 난 정말로 배우를 원하는 걸까.
학업은 끝나가고 있었다. 언제까지 연극영화과 전공하고 있는 재학생 배우일 수 없었다. 졸업을 하게 되면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조급함은 커져만 갔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많아졌다. 더 깊어지고 잦아졌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압박이 점점 심해졌다. 해답을 찾으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빠져나오기 힘든 늪에 빠진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답 없는 싸움을 반복하며 나는 점점 더 피폐해졌다.
주위를 둘러봤다. 이미 늪에 빠져버린 내 눈에 저들은 너무 멀리 너무 높이 있었다. 저마다의 목표를 안고 달려가는 그들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인사를 건넬 수조차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의지가 있었다. 열정이 있었다.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아니었다. 나는 계속해서 가라앉는 중이었다. 내 머릿속 나의 미래는 흐릿하고 희미했다. 그래서 슬펐다.
불안하고 불안했다.
청소년 때도 느끼지 못하던 사춘기가 세게 온 것처럼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불안해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내가 배우를 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선택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걸. 경쟁과 비교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기에 나를 자책하는 시간이 많았다. 우리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존재이길 바라던 나였는데 나만 빛을 바란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빛난 적도 없는데 억지로 버틴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를 설득시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