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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Mar 02. 2021

30. 걸어오던 길의 방향을 튼다는 것

공연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익숙한 사람보다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 더 많았지만 이제는 조금 더 유연하게 관계를 만들 수 있었다. 게다가 극의 전반에 등장해 중심을 이끌거나 미는 역할을 맡아 더 그러려고 노력했다. 모든 등장인물과의 관계도에서 한가운데에 위치한 캐릭터로 전보다 편안하게 공연에 임했다. 어쩌면 이미 마음속에서부터 마지막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서 더 차분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공연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새로운 준비를 시작했다. 몇 번을 망설이던 일이었다. 핑계는 충분했다. 당연하다고 여기며 걸어오던 길의 방향을 튼다는 것. 0에서 시작한다는 두려움. 늦었다는 생각. 스무 살의 패기와 열정이 지금의 내게는 없다는 생각. 도전하지 않는 이유는 많았다. 그러나 여기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이 패를 그냥 쥐고 있기에 나의 확신은 너무나도 여렸으니까. 마음속의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곳을 두리번대는 용기가 필요했다.




난 어렸을 때부터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속도가 빨랐던 건 아니었다. 꽤나 오랫동안 단어들을 제 멋대로 만들어 부르곤 했다. 이모는 아따, 회사는 이야, 양말은 마따로 부르는 식이었다. 발음의 문제가 아니라 나만의 세계 속에서 말을 배우고 익혔다. 시간이 지나 정확한 단어를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긴 시간 동안 나는 말을 잘하는 아이였다.


학부모 참관 수업에도 항상 발표는 내 몫이었다. 어차피 그런 수업은 미리 짜인 각본에 맞춰 진행된다. 평소에는 본 적도 없는 프로젝트를 켜고 많은 학생들은 정해진 순서대로 미리 정한 답변을 읊는다. 교실 뒤쪽에 나란히 서있는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주목을 받는 장면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린다. 일종의 쇼케이스인 셈이다. 난 언제나 마지막쯤에 등장해 모든 판을 끝내는 역할이었다.




사람의 시선을 끄는 것도 좋았고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좋았다. 카메라 앞에서 주눅이 드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며 생긴 열등감 때문이었다. 말을 잘한다는 것과 연기는 별개의 것이었으니까. 복수전공이었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도 막바지 학기를 앞두고 ‘아나운서 실습’이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다. 교수님은 현직 KBS 아나운서셨고 실기 위주의 수업이 연극영화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쉽게 학점을 따기 위한 선택이었다.


실제로 수업은 아나운서의 역할과 방송 이론, 실기로 진행되었다. 전공 수업이었지만 교양 수업처럼 재밌게 수강을 했다. 그리고 연기를 하며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의심하던 내가 잘하는 걸 발견한 시간이었다. 말을 잘한다는 칭찬은 내가 납득할 수 있었다. 이건 순간에 취해 내뱉는 사탕발림이 아니라 나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첫 진행의 기억은 초등학교 때 교육청에서 주관한 동요대회였다. 학교 대표로 동요대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동시에 진행자의 역할도 겸하게 되었다. 개량한복을 입고 마이크를 잡았는데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른 맛이 있었고 어렵고 떨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후에도 방송반 활동을 하며 학교 아나운서 역할을 맡았고 고등학교 때에는 축제 사회를 보기도 했다. 일부러 자처를 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이 또한 시작은 재미였다.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그냥 그게 좋았다.


이런 일련의 기억들이 누군가 앞에서 말을 하는 것이 어쩌면 나에게 맞는 자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왕이면 내가 잘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훗날을 생각해도 더 나은 선택이라 믿었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공연 연습을 시작함과 동시에 아나운서 학원에 등록했다.



30. 걸어오던 길의 방향을 튼다는 것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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