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교양수업에서 강연을 하나 듣게 되었다. 4학년을 대상으로 취업과 관련된 전문가가 강의를 하는 수업이었다. 자기소개서의 단골 주제 중 하나인 "실패했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는 강한 어조였지만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살면서 실패한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대해 답하는 것을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요. 실패한 경험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달리 말해 도전한 적이 없는 걸 지도 모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과연 나는 도전하며 살았는지, 혹은 실패하지 않을 것들만 선택하며 살았는지 말이에요."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건 긴장이었다. 강의실을 나와 좋아하는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생각에 사로잡혔다. 햇살을 따뜻했지만 내 마음은 점점 식어갔다. 학생들은 분주히 내 앞을 지나갔고 나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가져갔다.
실패한 경험, 실패한 경험이라. 내 삶이 평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깊은 좌절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어쩌면 나를 지키기 위해 슬프고 아픈 기억들을 저 멀리 묻어버린 걸지도 모르지만, 그건 실패에 기인한 기억들은 아니었다. 성공을 위한 도약으로써 실패는 없었다. 나는 도전한 적이 없었구나. 실패를 늘 두려워했구나. 만약 앞으로 패배와 실패의 장면들을 마주할 때 당당히 마주할 자신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 잠시 눈을 감았다.
배우를 한다는 것, 예술을 한다는 건 보이지 않는 실체 앞에서 끊임없이 자기와의 싸움을 통해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사 그렇지 않은 게 뭐 있겠냐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정말 중요한 분야이다. 잘한다고 해서 잘 되는 것도 행복한 것도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시절 그런 고민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꼭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랬다. 좋아하는 마음은 순수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냥 연기가 좋아서 하고 싶어, 라는 말을 꺼내기에 내 마음은 보잘것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봐주고 환호하는 관심이 좋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마음은 불순했다.
성공한 예술가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멋을 알고 그 멋을 대중들과 공유하는 것이 대중적인 예술가가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유명한 사람이 되어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미소를 띠며 레드카펫 위에 서서 한껏 꾸민 모습으로 손을 흔드는 것도 좋겠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익명성에 갇혀 하나의 작은 부분만을 전부인 것처럼 바라보며 평가할 것이다. 과연 나는 엄격한 잣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사실 성공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대부분의 꿈을 좇는 사람은 그 확실한 목표를 바라보며 자신의 때를 참고 감내한다. 혹은 일상의 다른 즐거움으로 행복을 대체한다. 내 마음에는 목표도 확신도 그리고 순수한 열정도 없었다. 오로지 연기 하나만을 바라보며 달리기엔 내게 주어진 여유가 없었다. 아니다. 핑계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비교하고 스스로를 다그치거나 부정하는 게 나를 불행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나는 확실한 결정을 짓지 못한 채 마지막 공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내 마음을 한 번 더 테스트하고 싶었다. 놓을 준비가 되었는지. 놓아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