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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상 Feb 12. 2021

23. 침묵보다는 표현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졸업 연극의 시작


졸업학기를 앞두고 있었다. 연극영화과에서는 졸업을 위해서 졸업작품에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한 학기의 연습시간을 갖는 연극과 프로덕션 기간을 갖는 장편영화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나는 두 작품을 각기 다른 학기에 진행하게 되었다.


학교를 떠날 생각을 하니 학과 작품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해가 지날수록 학과 내에서 제작되는 작품의 숫자도 현저히 줄었다. 신입생 때만 하더라도 거의 매달 공연이 올라갔다. 그렇다 보니 정신없이 스텝으로 들어가거나 단역 출연을 하는 일이 잦았다. 알게 모르게 학과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공연이 끝날 때마다 얻는 성취감도 조금은 있었다.




이제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면 내게 다시 주어지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용기를 내서 부딪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우리가 우리에게’를 같이 했던 형들 없이 나도 학과 작품을 선배로써 잘 끝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일종의 홀로서기랄까. 이유야 어찌 되었든 타이밍도 좋았다. 어차피 끝내야 할 과제였는데 의미를 부여하면 뭔가 동기가 더 생기니까.


연극 작품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의 도전이었다. 그간 했던 작품들은 창작극 위주라 같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일본 원작의 작품으로 섬세한 감정선이 요구되는 정극이었다. 지난 작품들은 늘 또래의 감정으로 연기하는 캐릭터였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몸이 아픈 아내를 떠나보내야 하는 어른의 역할이었다. 자체적인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선정했는데 애초에 내가 원한 캐릭터는 아니었다. 나와는 너무 다르고 해 본 적 없는 역할에 덜컥 겁부터 먹었다.




작품에 대한 분석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연습 시간에는 학과 수업 시간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 같이 모여 작품을 분석하는 프리 프로덕션의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 서로 느낀 점을 공유하고 유사한 캐릭터를 찾거나 학문적인 기초를 베이스에 두고 각자의 감정을 얹었다.


두 팀으로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라 서로 견제도 하고 격려도 하며 우리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서로 다른 컬러를 발견하면서 동시에 좋은 감정선 또는 동선과 리액션은 제 색깔대로 해석하려 했다.


특히 나와 같은 배역을 맡은 후배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을 가진 친구였다. 마치 뾰족한 샤프로 그린 듯 얇은 선의 얼굴과 모델 뺨치는 비율, 대사 소화력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까지. 묘한 질투심까지 들 정도였는데 이런 마음은 나를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 내가 느끼지 못한 감정, 내가 놓치고 있는 세밀한 움직임까지 그의 연기를 보며 부단히 노력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캐릭터 자체의 대사가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극 전반에 등장하고 있다 보니 무대 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말이 아닌 몸짓과 툭툭 던지는 대사 안에서 섬세한 감정 표현이 필요했다. 감정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아니라 속으로 삼키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기승전결은 필요했다. 때로 침묵이 답인 것처럼 말이다.


어릴 적부터 침묵보다는 표현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나 자신에 관해서도.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다양한 상황을 마주할수록, 스스로 덮어버리는 부분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런 마인드였을 수도 있고 혹은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삼키고 외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쌓인 감정들이 가끔씩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터져 나오기도 했다. 그날도 그냥 넘길 수 있었는데 결국 터지고 말았다.



23. 침묵보다는 표현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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