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카 정원에서 쉼표, 그리고 '정적의 도시' 임디나로

몰타 여행 ③

by 필로트래블

상부 바라카 정원에서의 한낮

상부 바라카 정원(Upper Barrakka Gardens)은 발레타에서 가장 여유로운 장소 중 하나다. 원래는 연병장이자 기사들의 휴식처였으나, 19세기 초 영국군이 프랑스를 몰아낸 뒤 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지금도 정원 아래쪽 포대에서는 매일 정오와 오후 4시에 예포가 울린다.


상부 바라카 정원 아래 포대


길게 이어진 아치형 회랑과 분수, 바닥을 느릿하게 거니는 비둘기들, 곳곳에 놓인 조각과 꽃들….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의 정원은 본래의 군사적 목적과는 달리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쾌청한 하늘 아래,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마저 여행자의 마음을 가볍게 했다. 우리는 이곳에 꽤 오래 머물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상부 바라카 정원


상부 바라카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하부 바라카 정원에 닿는다. 이곳에서도 그랜드 하버를 내려다볼 수 있지만, 전망만 놓고 보면 상부 바라카 쪽이 더 시원하다. 대신 하부 바라카에는 고대 그리스 신전을 연상시키는 기념비가 있고, 해 질 녘의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고 한다.

그랜드 하버와 별 모양의 성 엘모 요새

상부 바라카에서 내려다보는 그랜드 하버의 풍경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낸다. 이곳은 중세 시대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세계적으로도 드문 항구라고 한다.

그랜드 하버


항구 건너편, 작은 반도 위에는 별 모양의 성 엘모 요새(Fort St. Elmo)가 자리하고 있다. 16세기 요한 기사단이 건설한 이 요새는 수많은 침략 속에서도 몰타를 지켜낸 방패와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내부에 몰타 전쟁박물관이 들어서 있어, 몰타가 걸어온 치열한 시간을 조용히 전해준다.


성 엘모 요새


임디나, 과거의 영광에서 '정적의 도시로'


임디나는 기원전 700년경 페니키아인들이 몰타를 지배할 때 가장 처음으로 만든 역사 깊은 도시다. 로마의 치하에 놓이면서부터 지금처럼 성곽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고대의 숨결을 간직한 임디나는 발레타가 세워지기 전까지 몰타의 수도였다. 한때는 사람과 말발굽 소리로 가득한 도시였겠지만, 수도가 발레타로 옮겨진 뒤로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사람들이 이곳을 ‘정적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다.


이곳은 사도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던 중 풍랑을 만난 배가 파선하여 표류하다가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독사에 물리고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던 이야기와 열병을 앓던 추장 보블리오의 부친을 치유한 기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렇게 임디나는 기독교 신앙의 기억을 품은 도시가 되었다.


임디나 메인 게이트

임디나로 들어가는 문은 개다. 그중 사자 조각이 양옆을 지키고 있는 문이 메인 게이트다. 이 문은 1724년, 당시 기사단장 마노엘 데 빌헤나에 의해 세워졌다. 1690년에 일어났던 시칠리아 대지진의 여파로 임디나도 절반 넘어 무너졌고, 도시 재건 과정에서 이 메인 게이트도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새로 지어졌다.


문 안쪽에는 몰타의 수호성인인 성 바울과 성 푸블리우스, 성 아가타의 부조가 새겨져 있다. 도시 전체가 신앙 위에 세워졌음을 말없이 보여주는 징표다.

임디나 성곽과 메인 게이트

성 바울 대성당


성 바울 대성당은 사도 바울에게서 직접 세례를 받은 인물, 성 파브리우스(성경 속 보블리오)가 세운 몰타 최초의 성당인 것으로 전해진다. 9세기 이슬람 세력의 지배로 파괴되었다가, 13세기 노르만 시대에 성 바울에게 봉헌된 대성당으로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이 또한 몰타까지 강타한 시칠리아 대지진으로 대부분 붕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702년 몰타 건축가 로렌조 가파가 재건한 것이다. 두 개의 종탑과 코린트식 기둥이 조화를 이루는 파사드는 단정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진다.

성 바울 대성당


임디나 주변 곳곳에는 사도 바울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가 이곳에 기독교를 전파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다. 성 바울 대성당 외에도 임디나 건너편, 임디나 성곽 밖에 있는 라바트에는 성 바울의 카타콤, 성 바울 교회와 동굴(St Paul’s Church and Grotto) 등이 그 역사적 흐름을 이어간다. 특히 교회 아래에 있는 동굴은 바울이 3개월간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장소다.

정적이 흐르는 골목

임디나가 ‘정적의 도시’로 불린다고 하지만 카페와 성당들이 들어선 도로변과 광장들은 관광객으로 번화하다. 그러나 골목길로 접어들면 정말 정적이 흐른다. 호젓한 중세 골목을 천천히 걷다 보니, 중세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내 번화가(상), 골목길(하)


에필로그

아무런 예비 지식도, 큰 기대도 없이 찾았던 몰타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도시 전체가 연한 황톳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중세의 숨결이 살아 있는 항구와 골목, 요새 마을이 조용히 이야기를 건넸다. 눈부시게 화려한 성 요한 대성당, 평화롭고 전망 좋은 바라카 정원, 그리고 도시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닿을 수 있는 푸른 바다까지.


몰타는 그렇게, 조용히 사람을 머물게 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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