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도르차 와인투어, 몬탈치노·피엔차·몬테풀치아노

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②

by 필로트래블


피렌체 남쪽에 자리한 발도르차(Val d’Orcia)는 토스카나에서도 풍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평원이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사이프러스 나무들이 길을 따라 평행선을 이루던 장면 속 막시무스의 저택 배경이 바로 이곳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발도르차를 대표하는 세 개의 소도시, 몬탈치노·피엔차·몬테풀치아노였다. 이름만 들어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들이지만, 워낙 작고 외진 마을들이라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결국 하루에 세 도시를 모두 돌아보는 와인투어 상품을 이용했다. 결과적으로는 퍽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침 9시, 피렌체 레오폴드 역에 모여 전용버스에 올랐다. 일본, 미국, 포르투갈, 중국, 인도 등 다양한 국적의 여행자들이 한데 섞였다. 기본 언어는 영어였고, 수가 많은 일본과 포르투갈 여행자들을 위해 별도의 통역이 제공됐다. 시에나에 잠시 들러 몇 명의 여행자를 더 태운 뒤, 버스는 발도르차 평원으로 들어섰다.

차창 밖 풍경은 몽환적이었다. 수확을 마친 황금빛 포도밭, 늘씬하게 줄지어 선 진초록의 사이프러스, 그 사이사이 자리한 올리브 나무들, 그리고 부드럽게 물결치듯 이어지는 구릉의 능선. 발도르차에는 적당히 가라앉은 늦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개인 차량이었다면 아마 사진을 찍느라 일정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세 도시는 모두 높은 언덕 위, 성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중세 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쟁과 외침이 잦았던 시대의 흔적이다. 몬탈치노와 몬테풀치아노는 중세 도시이며, 피엔차는 르네상스 도시의 모델로 알려져 있다.

몬탈치노


첫 번째 목적지는 몬탈치노.

우리는 먼저 오랜 전통을 지닌 와이너리를 찾았다. 10헥타르의 포도밭과 같은 규모의 올리브 과수원을 경작하는 이곳은, 포도밭 절반이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품종으로 채워져 있다. 와인 판매사 이름은 ‘아바디아 아르뎅가(Abbadia Ardenga)', 와이너리의 이름은 칸티나 뮤제오 디 몬탈치노(Cantina Museo di Montalcino). 와이너리 건물의 역사는 10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몬탈치노, 와이너리 칸티나 뮤제오 디 몬탈치노


80세가 넘은 주인 할아버지의 설명을 통역을 통해 들으며 세 종류의 와인을 시음했다. 빵과 치즈도 함께 나와 아쉬운 대로 점심을 대신했다. 일행 중 적잖은 사람들이 와인을 구매했지만, 우리는 지켜보기만 했다. 무겁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행 중에는 짐이 늘어나는 일이 늘 조심스럽다.


몬탈치노, 와이너리 역사를 설명하는 주인 할아버지


몬탈치노, 와인 시음


도심에서 꽤 떨어져 있는 와이너리를 떠나, 몬탈치노 시내로 이동했다. 작고 단정한 마을이다. 성벽에 다가서면 발도르차 평원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까, 문득 그런 궁금증이 들었다.


몬탈치노, 성곽에서 바라본 발도르차 평원


마침 하교 시간이었는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통학버스를 타는 아이들, 부모의 차를 기다리는 아이들. 목도리를 멋스럽게 두른 신사와 눈이 마주쳐 가볍게 목례를 나눴다. 이탈리아 남성들의 목도리는 늦가을의 필수품인 듯했다.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게, 그러나 늘 멋있다.

마을 중앙의 탑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크게 걸려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 지역까지 장악했던 메디치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몬탈치노, 중심가의 탑과 메디치가 문장


기념품 하나쯤 사고 싶었지만, 눈에 띄는 것은 온통 와인 상점뿐. 결국 빈손으로 몬탈치노를 떠났다.


몬탈치노, 시내와 골목 풍경


피엔차


다음 도시는 피엔차.

원래 코르시냐노라 불리던 작은 마을을 재개발한 곳으로, 시에나에서 추방된 귀족이자 인문주의자였던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 훗날 교황 피우스 2세의 고향이다.

교황이 된 그는, 주민들이 열악한 삶을 살던 고향을 새롭게 만들기로 결심하고 건축가 베르나르도 로셀리노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다. 피엔차는 르네상스 인본주의 정신을 도시 설계에 본격적으로 반영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1996년,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피엔차 역시 언덕 위에 자리한 도시로, 성벽 어디에서든 발도르차 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인적으로는 몬탈치노보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피엔차, 성곽 위 성당의 종탑(상), 성곽에서 바라본 발도르차 평원(하)


도시에 들어서며 어딘지 피렌체를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마 이곳이 르네상스 양식의 도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보다 훨씬 단정하고, 깔끔하고, 세련됐다.


피엔차 두오모 성당(상), 건물의 메디치가 문장(하)


마을이 작아 골목골목을 천천히 돌아도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이곳에서는 드디어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다. 피엔차 풍경이 그려진 접시 한 장을 샀다. 두오모 성당 앞 타바키에서 커피와 도넛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마지막 목적지인 몬테풀치아노로 향했다.


피엔차의 골목


몬테풀치아노


몬테풀치아노 역시 와인으로 이름난 도시다. 규모는 앞선 두 도시보다 크지만, 언덕 위에 자리한 아름다운 성벽 도시라는 점은 같다. 붉은빛이 감도는 벽돌 건물, 좁은 골목, 아기자기한 상점, 그리고 시야를 가득 채우는 발도르차 평원이 어우러져,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몬테풀치아노의 성당(상)과 성곽(하)


마을은 벌써 성탄절 준비로 분주했다. 인부들이 상점마다 인공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에 오면, 훨씬 더 정겨운 풍경이 펼쳐질 것 같았다.

중심가를 둘러본 뒤 또 다른 와이너리를 방문했다. 몬탈치노의 가족 경영 와이너리와는 달리, 이곳은 기업화된 현대식 대형 와이너리였다. 와이너리를 계속 인수하며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고 했다.

다시 세 종류의 와인을 시음했다. 흥미로운 점은, 처음에는 서로 말도 섞지 않던 사람들이 와인을 한두 잔 마신 뒤부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술은 어디서나 사람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몬테풀치아노의 기업형 현대식 와이너리(상)와 시음장(하)


시에나에서 합류했던 미국인 아저씨는 특히 기억에 오래 남았다. 누구에게나 말을 걸며 분위기를 주도하던 그는, 귀갓길에 우리 옆자리에 앉았다. 놀랍게도 한국에 대해 꽤 깊이 알고 있었고, 남북문제에 대해서도 나름의 논리를 갖고 있었다. 그는 다음 날 친퀘테레 투어를 앞두고 최근의 폭우 피해를 걱정하고 있었다. 시에나에서 내릴 때까지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꽉 찬 일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피곤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느꼈던 피로감은 아마도 대도시의 복잡함, 그리고 수많은 문화유적과 예술 작품 앞에서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이었을 것이다.

발도르차의 소도시들은 그와 달랐다. 그저 걷고, 바라보고, 잠시 머무르기만 해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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