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초, 시간의 깊이를 보여주는 도시

토스카나 소도시 여행 ①

by 필로트래블

2018년 늦가을, 안식년을 맞아 피렌체에서 한 달 가까이 살았다. 도시를 서둘러 소비하지 않고, 걷고 머물며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들을 하루씩 떼어내어 다녀왔고, 그 첫 목적지가 아레초(Arezzo)였다.


아레초는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배경이 된 도시다. 오래전엔 제목과 내용의 간극이 낯설었지만, 다시 본 영화는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삶을 이해하는 깊이가 조금은 더 깊어졌기 때문일까.


피렌체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터널을 여럿 지나는 사이, 가을빛이 스며든 토스카나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흘러갔다. 수확을 마친 황금색 포도밭과 노란 잎들이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역을 나서자 중세의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는 도시가 펼쳐졌다. 이날은 유럽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리는 11월 첫째 일요일. 도시 전체가 노점상과 사람들로 가득했다.


귀도 모나코 길(Via Guido Monaco)을 따라가면 귀도 모나코 광장이 나온다. ‘도·레·미·파·솔·라’를 만든 수도승 귀도 다레초의 전신상이 세워진 곳으로,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 귀도 오레피체와도 겹쳐 묘한 친근감을 준다.


아레초, 수도승 귀도 모나코 전신상


귀도 모나코 광장을 지나 산 프란체스코 성당으로 향했다. 이 성당에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연작 〈참된 십자가의 전설>이 있다. 아담의 죽음에서 시작해 시바의 여왕과 솔로몬왕,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거쳐,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에 이르기까지, 십자가가 역사 속에서 전해지는 과정에 얽힌 전설을 서사적으로 그린 프레스코화다. 열두 점의 이 연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이 작품 하나만으로도 아레초를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아레초, 산 프란체스코 성당 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 연작 〈참된 십자가의 전설⟩사진


언덕 위 두오모 성당 뒤편 공원에 서자, 붉은 지붕과 사이프러스, 그리고 올리브 나무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레초는 역사와 자연을 모두 품은 도시였다.


아레초, 두오모 성당 뒤편의 일 프라토 공원


다시 내려와 그란데 광장(Piazza Grande)을 마주했다. 프라테르니타 델 라이치 궁전(Palazzo della Fraternita dei Laici)과 산타 마리아 델라 피에베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a Pieve)이 광장을 감싸며, 이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를 보여준다. 화려하지 않아서 더 오래 바라보게 되는 공간들이다.


아레초, 그란데 광장의 프라테르니타 델 라이치 궁전과 바사리 로지아


아레초, 마리아 델라 피에베 성당 파사드(상)와 종탑(하)


하지만 벼룩시장의 인파 속에서, 차분한 중세 분위기의 매력을 충분히 즐길 수는 없었다. 우리는 벼룩시장을 구경하기 위해 일부러 이날로 일정을 맞추었으나, 결과적으로 아쉬운 선택이었다. 설상가상 기대했던 점심 식사마저 실패로 끝나며, 마음은 점점 어두워졌다.


아레초, 벼룩시장의 노점상과 인파로 북적이는 거리


비가 간간이 흩뿌리던 오후, 우리는 예정했던 산책을 접고 이른 귀가를 택했다. 아레초는 그렇게 오래 머무르지 못한 도시로 남았다. 아마도 이곳은 북적이는 축제의 날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일에 천천히 걸어야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도시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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