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가란에서 오쿠노인까지
비가 내리는 고야산은 고즈넉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고야산을 둘러보고 가볍게 걸은 뒤, 오사카 간사이 국제공항으로 이동해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고야산은 볼거리가 많은 곳임에도, 의외로 번잡하지 않아 좋았다. 빗방울이 간간이 흩날리는 날씨는 오히려 이곳의 분위기를 한층 더 차분하게 만들었다.
고보 다이시가 남긴 자리
와카야마현 북쪽, 오사카현 동쪽에 자리한 고야산은 진언종 불교 사원 단지가 모여 있는 곳으로, 일본 불교 수행과 연구의 중심지다. 해발 약 900m, 둘레 약 15km의 분지를 여러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100여 개의 사원이 흩어져 있다.
‘고야산’이라는 이름은 실제 산의 이름이 아니라, 이곳의 중심 사찰인 곤고부지의 산호에서 유래했다. 일본에서는 사찰이 산속에 있지 않아도 관례적으로 산호를 붙였는데, 그 전통이 이곳에도 남아 있는 셈이다.
고야산은 일본인들에게 특별히 영적인 기운이 강한 장소로 여겨진다. 진언종을 일본에 전한 고승 구카이, 즉 고보 다이시도 이곳에 종파의 본부를 세우고 수행하다 입적했다. 교토의 히에이산과 더불어 일본 불교의 양대 성지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고보 다이시는 불교와 신토를 분리해서 보지 않았고, 그 영향으로 흔하지는 않지만 사찰 경내에 신사 건물이 함께 자리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는 종교인에 그치지 않고 시인이자 서예가, 기술자였으며, 일본어 가나 문자의 창제자이기도 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참배 길의 갈래
고야산을 중심으로 세 갈래의 참배 길이 뻗어 있다. 구마노고도의 하나인 고헤치는 고야산과 구마노 산단을 잇는 험준한 길이고, 뇨닌미치는 과거 여인들이 고야산에 들어갈 수 없던 시절, 산을 한 바퀴 돌며 참배하던 길이다. 조이시미치는 기노카와강 남쪽 지손인에서 고야산까지 이어지는 길로, 일정한 간격마다 돌로 만든 탑 모양의 이정표가 놓여 있는 것이 특이하다.
시코쿠 88 사찰 순례를 마친 이들이 마지막으로 고야산을 찾아 고보 다이시에게 감사를 올린다는 이야기는, 이곳이 ‘끝이자 시작’ 같은 장소임을 보여준다.
단조가란, 처음 세운 자리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고야산 성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다이몬을 지나, 우리는 먼저 단조가란을 찾았다. 이곳은 고보 다이시가 종파의 본부를 세우기 위해 첫 삽을 뜬 장소로, 고야산 전체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콘폰다이토를 중심으로 콘도, 미에도, 후도도 등 19개 건물이 모여 있는 단조가란은 진언종 사찰 건축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경내를 천천히 걷다 보니,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오랜 시간 신앙과 수행이 이어져 온 공간임을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절에서 묵는다는 것
단조가란을 둘러본 뒤 중심 거리를 따라 곤고부지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작은 사찰과 사당들이 들어서 있었고,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서양인들도 눈에 띄었다. 고야산에는 슈쿠보라 불리는 사찰 숙소가 50여 곳이나 있다. 이들은 아마 슈쿠보에서 머물려는 사람들인 듯싶었다.
슈쿠보에서는 사찰 생활을 체험할 수도 있고, 숙박만 할 수도 있다. 식사는 쇼진료리(精進料理)로 제공되는데, 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는 담백한 채식 식단이다. 고야산이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의 곤고부지는 다르다
곤고부지는 현재는 하나의 사찰 이름이지만, 과거에는 다이몬에서 오쿠노인까지 고야산 전체를 아우르는 경내로 여겨졌다. ‘일산경내지(一山境内地)’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곳이었다.
다이슈덴과 석정 반류테이, 실내 장식화 등 볼거리가 많았지만, 특히 지붕 위에 올려진 텐스이오케가 인상적이었다. 화재에 대비해 빗물을 받아 두는 나무통으로, 목조 건물이 많은 고야산이 얼마나 화재를 경계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참깨로 채운 단백질, 고마도후
점심을 먹기에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음식이 쉽게 소진된다는 ‘가도하마 고마도후’를 찾았다. 고야산 쇼진요리는 조리법·맛·색의 조화를 중시하는데, 이곳의 고마도후는 그 원칙을 잘 보여주는 음식이었다.
콩 대신 참깨로 만든 두부는 고야산의 명물이다. 그 옛날 스님들은 주로 참깨에서 단백질을 얻었다고 한다.
다섯 가지 방식으로 조리된 두부 요리는 모양도 맛도 인상적이었고, 나무 상자에 담겨 나오는 방식 또한 특별했다. 담백하지만 결코 심심하지 않은 한 끼였다.
오쿠노인, 30만 개의 침묵 사이를 지나며
식사 후에는 고야산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인 오쿠노인으로 향했다. 단조가란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이곳은 고보 다이시의 사당이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자 굵은 삼나무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고, 조금 더 걸어가자, 두터운 이끼로 뒤덮인 약 30만 기의 묘비와 공양탑이 끝없이 이어졌다. 도요토미 가문을 포함하여 일본의 역사적 인물과 무사, 현대의 기업인들까지, 시대를 가리지 않고 이곳에 잠들어 있다. 참배로의 서쪽 구간에는 옛날 묘비들이, 동쪽 구간에는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묘역이 자리하고 있다.
고뵤바시를 건너면 고보 대사의 사당이 있는 성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순간부터는 사진 촬영도, 모자 착용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만큼 이곳은 지금도 ‘살아 있는 성역’이다.
흐린 날씨와 빗속의 풍경이 겹쳐 오쿠노인의 분위기는 더욱 묵직했다. 걷기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성역의 깊이를 체험했다.
기운에 민감한 남편은 이곳에서 많이 힘들어했다. 우리 부부는 오래 머물지 않고 빠져나왔다.
걷기는 끝났지만, 길은 남아 있었다
와카야마의 5월은 걷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비와 맑음을 번갈아 겪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숲과 사찰, 마을의 분위기를 고루 느낄 수 있었다.
숙소와 식사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고, 특히 고야산에서 먹은 두부 쇼진요리는 오래 기억에 남을 맛이었다. 다만 일정 조정으로 트레킹 동선이 중복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구마노고도와 고야산은 다시 찾아 천천히 걸어보고 싶은 길이다. 걷는 동안 길은 말이 없었지만, 돌아보면 그 침묵이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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