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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머핀 May 05. 2020

[김머핀과 고양이들] 나와 코코와 살바 도르 달리

코코 1




코코는 2010년에 우리 집에 왔다. 4월의 어느 날, 아빠가 일하시다가 어미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셨다. 총 다섯 마리의 새끼 중 엄마 고양이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코코와 코코의 형아를 보고 데리고 오셨다. 코코의 형아가 코코보다는 더 대범하고 활달해(사실 동생일지도 모르지만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그냥 코코 형아라고 부른다) 쥐 잡을 고양이가 필요하다는 지인의 집에 보내졌고, 코코는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코코와의 첫 만남은 지금 생각해보면 “권장하지 않음”이라는 말의 표본이었다.

반려동물을 집으로 들이는 데 바람직한 과정이라고 하면 일단, 무슨 일이 있어도 동물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10년, 20년 동안 결혼, 출산, 이민 등의 계획이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인지, 내가 아프거나 해서 이 아이를 돌봐줄 수 없는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사료, 장난감, 병원, 운동 등 동물의 복지에 온전히 투자할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되는지 고려한 뒤, 가족 구성원 모두의 동의를 얻고 진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실생활에서 이 요건을 갖추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동물을 구조하게 되어 집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지만, 코코의 경우는 구조라고 하기 조금 애매한 상황이다.

어미 고양이가 있는 아기 고양이를 구조하는 경우는 어미 고양이가 혼자서 살아갈 능력이 안 되는 어린 고양이를 돌보지 않거나(이 경우 이유는 다양하다), 어미 고양이가 죽거나 심각하게 다쳐서 아기 고양이를 돌볼 수 없거나, 아기 고양이가 심각하게 아프거나 다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코코는 아마 다른 새끼들보다 몸집도 작고 성격도 소심하고 제대로 어미를 따라가지도 못해 그대로 두었다면, 길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고양이가 그러하듯 6개월도 살지 못하고 죽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데려올 당시에는 그래도 엄마 고양이가 신경은 쓰고 있어서 납치와 구조 그 사이 어딘가 애매한 경우이다.

 혹시 모를 비난에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그 당시에는 고양이가 대중적인 반려동물로 자리 잡기 전이어서 정보를 얻기 쉽지 않았고, 50대이셨던 아버지에게는 그 모든 관념들이 너무 낯선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아버지는 작고 치명적이게 귀엽고 약하디약한 생명체에게 홀리셨고, 그런 아버지 손에 들려 코코가 우리 집에 왔다. 모든 털북숭이 동물을 좋아하는 우리 자매는 쌍수를 들어 반겼다. 하지만 많은 어른들이 흔히 그렇듯 고양이에게 씐 선입견으로 인해 엄마는 고양이를 무서워했고(물론 그 작은 솜방망이 같은 코코를 보고는 귀엽다고 하셨지만), 털이나 냄새 등의 현실적인 이유로 반대를 하셨다. 하지만 이미 데리고 온 작은 생명체와 그 생명체에게 홀딱 빠져버린 10개의 눈동자를 보고 결국 굽히셨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코코는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정말 조용하고 얌전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우리 집의 실세인 엄마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처음 온 3일 동안은 급하게 만들어 준 숨숨집에 들어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있다가 밥 먹고 화장실 갈 때만 나와서 얌전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들어갔다. 그 뒤로 간간이 나와 치명적인 귀여움을 참지 못해 여기저기 만져대는 인간의 손길에도 가만히 몸을 맡기고, 옅은 베이비 블루의 눈동자로 우리와 눈을 맞췄다. 물론 그렇게 얌전했고, 말 잘 들었고, 지금도 소심하고 정도를 지킬 줄 아는 코코도 공포의 캣초딩 시절에는 신나게 사고를 치고 다녔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나가기로 하고.

 그렇게 갑자기 반쯤 납치당해 우리 인생에 등장한 코코는 털이 코코아색이라 ‘코코’라고 이름이 붙어 10년 조금 넘게 우리 집에 살고 있다. 아, 그때는 몰랐다. 고양이들이 크면서 눈과 털 색이 변하는지. 지금은 코코아라기보다는 시험 전날 사약같이 우려낸 진한 블랙커피 색깔이다. 이름을 ‘커피’나 ‘간장’으로 바꿔야 하나 싶지만, 어차피 다들 ‘코봉이’, ‘뚱냥이’, ‘코돼지’, ‘조코봉’, ‘고양이’ 등 다들 자기 좋을 대로 부르니 크게 상관은 없는 것 같다.

모든 만남이 준비된 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인한 부작용은 시차를 두고 온다. 언니들은 알고 보니 고양이 알레르기가 있었다. 한 명은 IgE 검사 수치가 300인가였고(100까지가 정상), 한 명은 ‘측정 불가’로 그 병원에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함께한다. 언니는 약을 먹고 환기에 신경 쓰고 털을 쓸고 닦고 면역력을 챙겨가면서 여전히 코코의 곁에 있다. 털과 냄새는 여전히 엄마에게는 힘든 요소이다. 그러나 코코의 행복은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려있기에, 코코의 평생을 책임지는 것, 성가심과 아픔까지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늘 고민한다. 밖에서 자유롭게 살았더라면 코코가 지금보다 행복했던 건 아닐까. 하지만 코코는 이미 우리와 살고 있다. ‘만약’이라는 가정이 인생에서 얼마나 힘이 없는지는 이미 내 인생을 통해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오늘도 코코의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것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정답이다. 준비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오늘도 생겨나는 수많은 만남 속에서, 그 어떤 경우에도 동물이 끝까지 행복하도록 최선을 다해 염려하고 행동하는 것이 동물과 함께 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해야 할 책임 아닐까. 정말 피치 못해 남에게 보내야 한다면, 적어도 그 사람이 자신을 대신해 그 아이를 행복하게 평생동안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인지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가끔씩 그들의 안부를 묻는 노력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 것이 상식인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오늘도 조용히 바라본다.


10년 전, 내 손바닥보다 작던 코코.

하루 종일 조용히 잠만 잤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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