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벌레의 삶

일상에서 신성을 발견하라고라?

by 야생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이런 것들을 어떻게 공양하듯 할 수 있지? 일상에서 신성을 발견하라니! <밥하는 시간>의 저자 김혜련은 교사 생활을 하며 이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전공한 페미니스트다. 교사 생활을 접은 후에는 지리산에 들어가 수행을 한 영성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결국 그녀가 돌아간 곳이 몸이고, 밥이며 생명이었다니! 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저항감을 어찌하리.


밥이 몸이 되고 생명이 된다면, 이 세상에 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 싶긴 하다. 그렇다면 밥하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고 그래서 매우 즐겁고 보람된 일어어야 하는데, 왜 나는 밥하는 일이 이렇게 지겹고 하찮은 일처럼 느껴지는 걸까? 김혜련은 <밥하는 시간>에서 이렇게 말한다.


"집안일이 일방적으로 여자들의 일로 규정된 사회에서, 더구나 그 일이 낮고 천한 일로 취급되는 세상에서 집안일을 좋아할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 허구헌 날 해도 빛도 안 나는 일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녀는 밥하는 일이 즐겁지 않고 하찮게 느끼는 것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집안일을 여자들의 일로 규정하고, 그 일을 낮고 천한 일로 취급하는 세상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 여자 자신도 그 일을 좋아할 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가장 중요한 일을 가장 하찮게 여기는 세상에서 여자들은 오늘도 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가장 고귀한 일이라고 애써 마음을 다잡는다. 눈물겨운 밥 짓기다. 나는 밥하는 일이 여자들만의 일이 아닌, 인간 모두의 일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너도 하고 나도 하고, 우리 모두가 밥을 한다면, 밥하는 일이 결코 하찮은 일이 될 수 없으리.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드는 인간이라면, 밥하는 일이 참 하찮게 느껴질 것이다. 무엇을 먹을까 계획하고, 시장 가서 하나하나 먹거리를 고른 후, 다듬고 자르고 끓이고 볶고 지지고 차리고..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식탁 앞에 앉는 넘들에게는 밥상이 참 하찮게 보일 것이다.


작년 가을부터 우리 집 풍경이 달라졌다. 라면도 제대로 끓이지 않던 남편이 주말에 밥을 하기 시작했다. 차려주던 밥만 먹던 아이들도 장을 보고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고 밥상을 차린다. 20여 년 동안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렇게 여럿이 나누어서 하니, 그 해방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동안 어떻게 참고 그렇게 혼자서 묵묵히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즐거운 밥 짓기를 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꿈꾼다.




2020년 3월 김혜련의 <밥하는 시간>을 읽고, 엎치락뒤치락하는 나의 심경을 적은 것이다. 나는 그 책을 빌미로 울분을 쏟아냈다. 그 당시 남편과 아이들이 밥하기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되었는데도 나의 분노는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던 거다. 그로부터 7개월가량 시간이 흘렀다. 나의 생각도 구름처럼 흘러갔다.


그때는 김혜련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떼를 써서라도 저항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김혜련의 글들이 내 삶 속에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어제 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여운 때문일까.


<리틀 포레스트>는 연인과 헤어진 것을 계기로 도시생활을 접고, 고향 마을 코모리로 돌아온 젊은 여성 이치코의 시골살이를 그린 영화다. 그녀의 집은 계곡과 숲과 들로 둘러싸인 곳에 있다. 뭐라도 사려면, 자전거로 30분, 걸어서는 1시간 30분이 걸려 작디작은 상점에 도달한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대부분의 것을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 투성이다.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잼 하나 만들려 해도, 나무에서 열매를 채취하고, 씨를 제거하여, 설탕을 넣고 졸이는 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만만치 않다.


이치코는 먹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애벌레처럼 하루 종일 움직인다. 그녀는 이런 삶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토마토는 생명력이 강하지만, 많은 비가 내리면 잎과 줄기가 생기를 잃고 말라버린다. 비가 많이 내리는 코모리에서 토마토를 잘 길러내기 위해서는 하우스를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이치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하우스를 만들면 왠지 자기가 거기에 정착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그녀는 언젠가 때가 되면 떠날 작정이다.


반면 유우타는 다르다. 그는 이치코의 2년 후배다. 이치코는 그에게 귀향 이유를 묻는다.


"유우타 넌 왜 코모리로 돌아왔어? 여길 나가고 싶었잖아. 학교는 구실이었고."

"물론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어. 그래서 거기서 취직도 한 거고. 그쪽 사람들은 코모리랑 말하는 게 달라. 사투리 같은 거 말고. 자신이 몸으로 직접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 자신이 진짜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신뢰해. 그런데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체하고 남이 만들 걸 옮기기만 하는 놈일수록 잘난 척 해. 천박한 인간이 하는 멍청한 말 듣는데 질렸어."


그가 귀향한 이유다. 의미심장하게 들리지 않는가. 그가 존경하는 사람이란, 직접 몸으로 체험해서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배운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반면 천박한 사람이란, 몸으로 아무것도 한 게 없는 주제에 뭐든 아는 체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밥하는 시간>의 저자 김혜련을 떠올렸다.


"나는 평생 해왔던, 그럴듯한 관념 속에서 관념과 관념 사이를 부나방처럼 날아다니기를 그만두고 땅을 기는 애벌레의 삶을 살기로 한 것이다. 애벌레의 삶은 느리고, 구차하고, 지리멸렬하다. 맨몸으로 배를 땅에 밀착시키고, 온몸을 움직여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녀는 말한다. 땅을 기는 애벌레의 삶을 살기로 했다고. 오랜 인생의 여행 끝에 도달한 결론이다.


애벌레의 삶이란 맨몸으로 배를 땅에 밀착시키고, 온몸을 움직여 구체적으로 사는 것이다. 유우타가 말한 것처럼 몸으로 체험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는 삶의 자리! 그것은 하강의 자리요, 일상의 세계요, 하찮은 삶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곳은 몸과 생명이 꿈틀거리는 진정 인간다움의 자리요, 신성을 발견하는 곳일 수도.


난 요즈음 갱년기로 인한 불면과 소화불량, 변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약을 먹고 있다. 먹은 지 보름이 지난 지금, 어느 때보다도 밥이 달다. 더부룩하던 속도 나아지고 소화도 잘되는 느낌이다. 밤에는 눕자마자 잠이 든다. 배변도 시원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싸니, 기분이 좋고, 삶이 즐거워진다. 몸의 세계가 마음과 삶에 이렇게 깊이 작용을 하다니.


그동안 나도 김혜련 작가처럼 관념과 관념 사이를 부나방처럼 날아다니며, 의미와 목적을 찾아 헤맸었다. 더 고상하고, 더 이상적이고, 더 인간다움의 세계를 발견하고자 말이다. 그런데 그때는 그랬다. 자신이 인생 미달인 것처럼, 잘못 살고 있는 것처럼, 막살고 있는 것처럼, 빗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채찍질했었다. 무겁고 버거웠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을 나는 새를 본다. 들에 핀 한 송이 꽃을 본다. 아참, 애벌레도 그렇지. 그들은 목적 따위, 의미 따위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의 세계에서 부유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 주어진 생명을 묵묵히 힘껏 살아낼 뿐이다. 몸을 길러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들뿐이랴. 김혜련의 삶도, 유우타가 살고 싶은 삶도, 자의든 타의든 그렇게 살고 있는 이치코의 삶도 그렇다. 난 그들 가운데 신성을 발견한다. 공양하듯 밥을 짓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똥을 싸며 생명을 가꾸는 일이 수행의 자리임을 조금은 깨닫는 아침이다. 이 깨달음에 오기까지 부엌에서 함께한 식구들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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