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어나자마자, 교통상황을 체크했다. 농장에 가기 위해서다. 강원도 쪽으로 가는 귀향 차량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했다. 나는 어제 스쳐 들었던 뉴스 이야기를 했다. 5명 이상 모여서 만약 코로나 확진이 된다면, 그 치료비를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정부 방침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 귀향하는 사람이 많지 않겠다는 것이 우리 둘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코맹맹이 여자 목소리를 낸다.
"어머니, 이번에는 코로나 때문에 못 내려가요."
"당신, 지금 여자들 흉내 내는 거야? 아직도 명절 하면 며느리들이 시댁에 가서 전 부치고 상 차리고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냐?"
남편은 할 말을 잃었지만, 그 잃어버린 말이 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번 설에는 코로나 핑계로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땡잡았다는 것이리라. 이야기가 식탁에서 계속 이어졌다.
"이번 코로나가 설 풍속도를 바꿔놓을 것 같은데."
"맞아, 엄마!"
딸이 맞장구를 친다.
"야, 할머니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는 방바닥에 엉덩이 붙일 새도 없이 부엌에 들어갔잖아. 남자들은 방에서 TV 보며 밥상이나 받고"
그때 그가 끼어든다.
"어이구, 몇 번이나 했다고."
일단 맞는 말이기는 하다. 결혼하고 바로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댁하고 상관없이 산 세월이 8년 정도다. 귀국해서 시댁에 명절 때마다 들락거린 것도 그 비슷한 세월이다. 그리고 지금은 시댁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명절에는 귀향 귀경 인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만약 시부모님이 90세 이상 장수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다면? 그리고 코로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5,6시간 도로에서 보낸 뒤 바로 부엌으로 직행했을 것이다. 그는 운전하느라 힘들었다는 치사를 받으며 쉬었을 거고.
며느리들이 무료 의무 봉사를 해야 하나?
어이구, 몇 번이나 했냐고? 오늘도 그의 속마음을 확인한다.
'그때는 당신이 고생했지. 고마웠어.'
이런 말이 나와도 시원찮을 판에.
'남들 다 하는 것 꼴랑 몇 년 세월 한 것 가지고 뭘 그래?'
이 말을 속에 삼킨 말투다. 그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은 명절마다 때마다 무료 의무 봉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는 요 몇 년 많이 변했다. 집안 일도 공치사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의 의식도 새로워져 말도 잘 통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의 깊이 숨어있는 속마음이 드러난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말들,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말들은 수십 년 동안 몸에 밴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시댁에 아들보다 며느리가 잘해야 된다고?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었다.
"며느리가 더 잘해야지."
시댁에 자기보다 내가 더 잘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 내가 더 잘해야 되는 거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네 부모님인데 당신이 잘해야지, 왜 내가 잘해야 돼?"
잘해야 된다는 건 일주일에 한 번 전화를 하라는 거였다. 그런데 시댁 부모님이 어떤 걸 기뻐할까. 아들이 전화하는 걸까. 며느리가 전화하는 걸까. 이건 물어보나 마나 한 질문 아닌가. 근데 왜 문안인사를 며느리가 해야 하지? 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이 전화해."
결국 시부모님 살아생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그가 전화를 했다.
왜 그는 자기보다 내가 더 자기 부모님에게 잘해야 한다고 한 걸까. 왜 자기 부모를 공경하라는 유교적 가르침, 자식의 도리를 나에게 떠넘기려고 했던 것일까.
며느리들의 삶은 왜 이리 무거울까?
오늘 새롭게 인식한다. 남자로 사는 가벼움과 여자로 사는 무거움에 대해. 남자는 태어나자마자 적어도 우리 세대까지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의 기쁨이 되었고, 교육 혜택도 더 많이 받았다. 결혼해서는 남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라는 이유로 권위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에게 권리 말고 의무라는 것이 부여된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다. 부모를 부양할 의무마저 아내에게 떠넘기고.. 그 인생이 얼마나 가벼울지 상상이 안된다.
반면 여자는 남편의 부모님까지 떠맡아야 하는 무거운 인생이다. 그 무거움에 대해 침묵하며 고분고분해도, 고마움은 커녕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조금이라도 부조리에 대해 언급하면 얄짤없이 나쁜 년이 된다. 이런 풍속도에 비춰보면 그의 말이 맞다. 나는 얼마 하지도 않은 나쁜 며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