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청춘으로 이어지는 낭만적 일상
성공한 성애적 사랑의 사례를 경험한 적 없는 채로, 여자 친구라는 역할놀이에 심취해 있던 나는 극단적인 자기 대상화의 사례로 발전되었다. 학창 시절의 나는 스스로가 생각해보았을 때 이상적인 여자 친구라면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했다. 기념일을 챙기고, 남자 친구와 함께 먹을 도시락을 싸고, 학교 앞에 깜짝으로 찾아가고, 예쁜 편지지를 사서 '여보를 만나서 너무 행복해. 여보를 만나고 나서 내 삶이 바뀌었어. 우리 지금처럼 앞으로도 예쁘게 만나자.'따위의 내용을 템플릿이 있는 것처럼 외워서 적어내려 갔다. 내가 정말 기념일을 특별한 날이라고 생각하는지, 그날에 동물원에 가는 것이 정말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펜을 들어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래야 했다. 여자 친구라면, 연인이라면 그러하니까.
나는 남자 친구의 친구들이 "oo이 여자 친구 예쁘던데?"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 걸 뿌듯해했다. 그것이 곧 나의 외모의 수준을 말해준다고 생각했다. 누구와 사귀면 남자들 사이에서 "걔 여자 친구 예쁘잖아"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딱 그 정도로 예쁘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다. 덕분에 얄팍한 외모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학교 앞에 예고 없이 찾아가는 날이면, 그가 나오기 전까지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남자 학생들의 시선을 즐겼다. 그러다 익숙한 그의 친구들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했고, 아직 나오지 않은 남자 친구를 부러워하는 말을 웃음과 함께 겸손하게 듣는 척했다. 남자 친구가 나오면 그의 팔짱을 끼고 보란 듯이 분식이나 먹으러 갔다.
관계를 가질 때에도 '내가 그러고 싶은지' 보다 '그래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내가 쾌락을 느끼는 것보다 쾌락을 느끼는 척을 잘하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가 가지는 관계가 이미지적으로 예뻐 보이고, 그가 나를 섹시한 여자로 보는 것이 나의 만족도보다 우선순위였다. 아니, 나의 만족도는 순위 차트에 있지도 않았다. 나에게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내밀한 교류도 아니요, 쾌락을 해소하기 위함도 아니요, 그저 이상적인 여자 친구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기준에 부합하기 위한 발장구였다. 이러한 말들이 꽤 절망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사실 그때의 나는 이러한 상태에 꽤 만족을 하는 편이었다. 주변의 반응과 남자 친구의 반응이 나를 정의했고, 정의된 나는 꽤 괜찮은 여자 친구였다. 물론 이는 속이 텅 빈, 아주 반짝반짝하고 딱딱한 껍데기에 불과했지만.
나는 개인적인 사랑 대신 사회적인 연애를 했다. 덕분에 매일 화장을 하고, 살이 찌지 않도록 관리하고,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 놀기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는 이미지에 다가가기 위해, 매일 새벽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였고, 놀 때는 뒤집어지게 놀았다. 참 이상한 순기능이다. 내 남자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나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도 열심히 공부하고, 뒤집어지게 놀고 그 과정에서 나와 연애를 했고 주변의 부러움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커플로써의 우리의 이미지는 각자의 셀프 브랜딩에 톡톡한 효과를 주었다. 서로의 지인을 만나며 인맥이 넓어졌고, 모의고사에서 또 1등급을 받았고, 대학 지원은 모두 인서울의 상위권 대학일 것이라는 서로의 잘난 조건이 상대방을 꾸며주었으며, 그 와중에도 연애 가능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그에게는 알맹이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껍데기를 보기 좋게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