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눕기 전에는 내가 잠에 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알약을 몇 개 먹었다. 이 약들은 어느 한 의사가 처방해준 것이다. 그의 고마운 몇 문장으로 나는 수면제를 사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사회의 구조 덕분에 나는 그와 갑을 관계에 처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그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많고, 이 수면제도 그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들고 아무리 약사 앞에 찾아가 긴긴 하소연을 하더라도 나는 결코 이 알약 몇 줌을 받아내질 못했을 것이다. 누워서 잠에 들려고 했다. 아니, 사실 잠에 들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워서 책을 읽었다.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그 뒤에 출판사에서 덧붙인 이방인의 해석 논문을 읽었다.
"우리들 각자는 최대한 삶과 경험을 쌓아 가지만 결국 그 경험의 무용함을 너무나도 분명하게 느끼고 만다. 무용함의 감정이야 말로 그 경험의 가장 심오한 표현인 것이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1934~1935년 겨울에 카뮈가 친구 막스 폴 푸셰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논문의 저자는 "이미" 20대 초반에 카뮈가 편지를 통해 이러한 말을 한 적 있다고 강조했는데, 어린 나이에 비해 성숙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이방인>에 대한 준비가 자신의 생각보다 일찍 이뤄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십 대 초반을 보내고 있는 나는 이 문장을 보면서 관자놀이의 혈관이 뛰는 것이 느껴지는 것과 같은 흥분을 느꼈는데, 이는 내가 무엇인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거나 큰 감동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이 혈류를 이어받아 길게 생각을 펼쳐 글로 써내기에는 아까 먹은 알약들이 내 눈꺼풀 셔터를 끄집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덮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눕기로 한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애매한 상태다. 자기엔 졸리지 않고 자지 않기엔 졸린 상태. 애매하게 술에 취했을 때만큼이나 골치 아픈 상태이다. 나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의사가 친절하게도 잠이 오지 않을 때 추가로 먹으라고 처방해 주었던 약을 먹어보기로 한다. 이 약은 한 알 전체를 먹기보다는 반 알을 먼저 먹어보고 경과를 지켜보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친절한 의사가 설명해 주었다. 내가 어젯밤에 알약 하나를 부러트려 반은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알약 통에 넣어 놓았으므로 분명히 이 알약 통에는 반 개 짜리 알약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고정된 사실이다. 나는 검지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알약 통을 휘저으며 내 손가락이 들어가고 남은 틈새로 눈을 비집어 반쪽 짜리 알약을 찾아본다. 그러나 그 알약은 순순히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중간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그냥 이번에도 알약 하나를 반으로 부러트려 넣어놓고, 오늘처럼 반쪽 짜리 알약이 필요한 다른 날에 꺼내 먹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안에 반쪽 짜리 알약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포기하고 다른 것을 대상으로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마치 내 인생과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이 반쪽 짜리 알약 찾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래, 늘 내 인생은 이런 식이지 뭐'라는 말에 동의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라는 결론으로 이르게 된다.
나는 반쪽 짜리 알약을 찾음으로써 내 인생을 약간만 구원하기로 했다. 내가 여기서 약간이라고 한 이유는, 사실 알약을 찾는다 하더라도 내 인생에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순간, 스스로를 죄책감으로부터 면책시켜줄 것이므로,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검지를 몇 번 더 휘휘 젓고, 더듬거린 끝에, 곡선들 사이에서 까칠한 단면을 찾아낸다. 검지의 끄트머리로 그것을 잘 끌어올려 밖으로 구해난다. 손바닥에 올려 그 알약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이렇게 똑같이 생간 알약이 수북이 들어있는 알약통에서 어제와 같은 아이를 찾아내 다시 만난다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나는 이 만남에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한다. 이 알약은 반쪽 나지 않았더라면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반쪽 짜리 알약을 먹고 나는 침대에 눕는 대신 책상 앞으로 와 아까 보다 더 본격적으로 <이방인>을 읽어 보려다가 이내 단념하고 만다. 얌전히 침대에 누운 나에게 내가 삼킨 알약이 이제 좀 자라고 나에게 잔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내 눈알에 대고 잠에 들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눈꺼풀 셔터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내리려 한다. 허벅지 뒤가 가려운데 내 마음대로 긁지도 못하게 손도 얌전히 묶어둔다. 수면제는 보통 다 이렇다. 나의 의견이나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자신의 일이나 빨리 끝마치면 그만이다. 상냥한 수면제는 없다. 수면제가 날 잠재우는데 실패하게 되면, 친절한 정신과 의사는 이 실패를 의사 노트에 적어 놓고, 알약에도 짧은 개인적인 노트가 적힌다. 그렇게 된 후 결국 다른 약으로 대체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수면제를 이해한다. 다 먹고사는 일이니 탓할 수 없다.
나는 조만간 나의 수면제와 화해를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수면제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아직 고민 중이다. 평소와 다른 서프라이즈, 물 없이 알약 삼키기와 같은 이벤트가 그의 취향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니면 따뜻한 물과 마시는 것을 좋아할 수 도 있고, 얼음이 떠있는 얼음물을 선호할 수도 있다. 나는 늘 칫솔질과 치실질 후에 수면제를 먹으니 물이 아닌 주스나, 탄산음료 같은 것과 함께 약을 먹는 것은 질색이지만, 그것이 내 수면제의 취향이라면 시도해볼 의향은 있다. 어쩌면 힌트를 얻기 위해 친절한 의사를 다시 방문해야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친절한 의사는 의심이 많다. 내가 어떻게 하면 수면제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해 궁금해한다면 그 이유를 알려고 들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수상하지 않게, 명료하게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가령 '보통 수면제는 물 말고 다른 것과 함께 섭취했을 때 더 효과가 좋을 때가 있나요?'라던가 "역시 약은 물이 최고죠?"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짐작이지만 내 수면제는 남들과는 다른 특이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 사실을 친절한 의사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정신과 의사니까 이런 것에 전문이겠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정신과 의사더라도 자녀의 익스트림한 성적 취향과 같은 곤란한 문제들은 이해하고 인정하기 까지 꽤나 굴곡진 과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때문이다. 이러한 의사의 의심망을 잘 피해서 내 수면제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 유용한 정보를 빼오는 것이 내 다음 상담일의 목표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쯤 나는 잠에 들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