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그리는 방식에 대해
언제고 꾸준한 자신의 "취향"을 가지는 이들을 동경한다. 단순한 패턴에서도 스스로의 색을 발견하는 사람, 그것을 발전시켜 선으로 만드는 사람. 그래서 나 라는 파레트의 채도를 맞추어 통일성을 일구어 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가지는 빛은 조금 남다르게 느껴지곤 한다.
웬만한 것에서는 남과 비교를 하지도 않는 내가 가끔 괜히 작아지는 것이 그런 부분이다. 본디 물건에 정이 없고 오래 쓰는 이유는 고장나지 않아서, 사는 이유는 지금 예뻐 보여서 정도의 패턴을 가진 나의 파레트는 형형색색, 중구난방의 채도와 명도로 어지럽다. 개중에는 어떠한 이유로 지속성을 가지는 것들도 있기는 한데, 그건 취향의 문제라기 보다는 불편함을 줄이기 위함인지라 그 깊이가 깊지 않다. 그러면 한순간 살아온 인생의 패턴에 아쉬움이 들고, 이유를 찾다보면 으레 돈이나 지식의 부족 따위였다는 것에 대해 또 다시 아쉬움이 든다. 그정도 서치도 못했단 말인가. 몇푼이나 차이가 난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의 파레트는 늘 탐나는 법이라, 몇번이고 지금부터라도! 하며 어떤 색을 정해보려고 하지만 도무지 내 취향이 "싸구려"인건지, 그렇지 않다면 (쓴 돈은 비슷하단 말이지) 아마도 인내심의 부족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그럼 이 문제는 #개성 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들의 개성은 조금 더 특별하고 내 개성은 가벼운가? 하지만 어디에서도 개성이 없는 사람을 본 적도 없거니와 개성이 없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런 고민은 끝을 맺지 못하고 늘 제자리를 맴돌며 이따금 나를 괴롭혔다. 알록 달록한 인스타그램 피드가 보잘것 없어 보일 때도 있고 카오스에 가까운 휴대폰 앨범은 포기 상태. 그렇게 개성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중 오늘 처음으로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릴 기회가 있었다.
아크릴 물감은 참 묘해서, 지나간 자리가 그대로 남는다. 금방 짠 아크릴 물감은 다른 색과 쉽게 섞이지만 한번 굳어진 이후에는 재활용하기가 어렵다. 수채화 물감처럼 맑은 맛은 없지만 그대로 탁하고 꾸덕한 질감도 그만의 매력이고, 무엇보다 그 탁한 색감이 캔버스에 펼쳐지면 형형색색의 일관성없는 색의 배열도 그럴듯한 붓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어낸다. 거칠게 지나가는 헤나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물감은 텍스쳐가 되어 입체감을 주고 미처 섞이지 못해 자리를 남긴 물감이 있다면 잠시 말린 뒤 덮어버리면 그만이고 무거워진 파레트는 버려버리면 끝이다.
어쩌면 나의 파레트는 수채화 파레트가 아니라 아크릴 물감의 그것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휩쓸려서, 때로는 고집스러워서 짜 낸 물감. 그 당시의 나름의 기준으로 그려낸 투박하고 거친 흐름. 그러다 보니 여기 저기 얼룩 덜룩 통일성 보다는 덮고 덮다 그저 버리기도 했던 파레트. 개성은 쉬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 파레트에 비유하기 보다는 캔버스로 말하는 편이 낫겠다. 그러니 오늘도 이 파레트에 "좋아보이는" 물감을 쭈욱 짜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기로 하는 막무가내의 개성파. 별로다 싶으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다 보면 이 캔버스엔 또 나대로의 흐름이 남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