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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킴나 Mar 05. 2019

조명을 살 수 있을까

과연

물건에 대한 애착이 적은 편이다. 뭔가를 아껴쓴다거나 먼지를 털어 보관한다거나 영원히 간직한다거나 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물건을 막 쓰기도 하고 제자리에 잘 두지 않기도 한다. 여기저기 벌려놓고 떨어뜨려놓아서 방에 있는 물건들은 자기들끼리 증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싹 정리를 한 책상은 다음 날 아침이면 화장품으로 너저분해져 있고, 옷을 예쁘게 걸어서 꼭 닫아놓은 옷장은 어느새 옷을 토해내듯 밑으로 흘리며 입을 조금 벌리고 있다.


그래서 내 공간은 맨날 너저분하다. 엄마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 게시판에 내 방 사진을 찍어 올리겠다고 협박했다. 나름대로 똑부러지는-전교1등-반장의 이미지를 지켜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툴툴거리면서 치우겠다고 하다가 머리를 감으러 갔다. 대야에 물을 받아서 허리를 숙인 채로 머리를 감으며 설마 정말 올리지는 않겠지 조금 걱정했다. 하지만 학교 홈페이지에는 엄마가 글을 쓸 게시판이 없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결국 별 일 없을거란 생각에 머리 감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SNS에 올라가는 시대였다면 나의 이미지는 이미 엄마의 인스타스토리 속 폭로로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그 때 잔뜩 창피를 당했다면 버릇이 고쳐졌을까. 어쩌면 그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때는 인스타가 없었으므로 나는 여전히 너저분하게 살고 있다. 본가에서는 엄마가 한숨을 푹푹 쉬며 치워줄 때도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엄마가 오지 않는 자취방이다.


동아리 홍보 물품들이 바닥에 깔려있고 어제 다녀온 쇼핑의 흔적들도 바닥에 그대로다. 다행히 새로 산 옷은 걸어뒀다. 껍데기만 돌아다닐 뿐. 5평이 조금 안되는 이 공간에는 싱크대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세탁기, 화장실, 전자레인지, 책상, 침대, 책꽂이가 있다. 옷장도 있다. 신발장도. 글을 쓰면서도 숨이 차는데 이 모든 것들이 5평 안에 있다. 그나마 이 집은 전에 살던 집보다 커진 것이다.


큰 불만은 없다. 친구 두 명이 오면 세명이서 같이 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아빠다리를 어정쩡하게 하고 앉으면 딱 맞는 높이의 앉은뱅이 식탁도 있다. 창문 밖은 건물이 전부 차지하고 있지만 나름의 틈새로 햇빛도 들어온다. 창문도 큰 편이고 방음도 잘 되는 편이다. 스피커를 크게 틀어놓을 때가 많아서 방음은 필수 조건이다.


하지만 얼마 전 친구네에 다녀온 이후로 이 공간에 대해서, 나의 집에 대해서 자꾸만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에는 6명이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식탁이 있어서 학회가 끝나고 저녁을 먹은 뒤 우리는 다같이 그 집에서 일을 하기로 했다. 친구에게는 이쯤 되면 코워킹 스페이스로 돈을 받으라고 했다. 총 8명이었다. 두 명은 침대에 앉고 6명은 식탁에 앉았다. 친구는 천장 조명을 켜지 않고 두 개의 노란 조명을 켰다. 좀 어두컴컴한 것 같기도 한데 나름대로 분위기가 있었다. 비결은 노란색 전구였다. 우리 집에 있는 장스탠드는 형광등 색이었다. 당장 저것부터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벽에는 마티스의 그림 포스터와 엽서 몇 장이 붙어 있었다. 문에 붙은 중경삼림 엽서가 탐났다. 선반에는 피규어 네개, 비틀즈와 서태지의 LP, 그리고 와인 몇 병이 있었다. 가보기 전부터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좀 더 충격이었다. 심지어 좀 좋은 냄새도 났다. 나는 끊임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남자애들이 더 잘 해놓고 산다더니... 물론 말도 안되는 말이란 걸 안다. 나는 여자라서 방청소를 못하는게 아니라 그냥 내가 못하는 거다. (하지만 내 남동생은 살림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일종의 생존전략이기도 했지만.)


그 집에 다녀온 뒤로 조명을 검색해봤다. 5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테이블 조명 한 개와 노란 전구를 살 수 있었다. 집 앞 마트에서는 노란 전구의 감성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친구는 앞으로 4개월 계약 남은 집에 뭐하러 그렇게 투자하냐고 했지만 나는 남은 4개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그정도는 쓰고 싶었다. 장바구니에 조명과 전구를 담고 이 돈을 어디서 마련할지 생각하다가 지난 학기에 꽤 비싸게 주고 샀던 전공교과서를 떠올렸다. 에브리타임에 책을 판다고 올렸다. 거래가 끝나면 조명을 살 것이다.


솔직히, 장바구니에 조명을 담으면서도 조명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입은 청바지가 머리맡에 있고 어제 입은 체크 자켓이 의자에 걸려 있으며 저녁을 해먹은 프라이팬은 설거지통 안 최소한의 예의같은 미지근한 물 속에 담겨있다. 으음.. 일단 집부터 치우고 조명을 사야겠다.


그럼 조명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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